[데스크에서] 닉슨의 중국, 이재명의 일본

노석조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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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쌓아둔 취재 수첩을 정리하다 한 부분에서 눈길이 멈췄다. 윤석열 정부 초기 여권 인사들과 식사하고 적어 놓은 메모 한 쪽. 윤 전 대통령이 2022년 방미 때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 나눈 비공개 대화 내용이었다.

키신저는 윤 전 대통령에게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 데탕트(긴장 완화) 시대를 연 경험담을 꺼내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키신저는 “윤 정부의 ‘가치 외교’의 취지는 알겠다”면서도 “국제사회의 ‘현실’을 ‘가치’만으로 담기 어렵다는 건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설사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더라도 적과 손을 잡는다는 ‘현실 정치’의 대가(大家)다운 조언이었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를 방중 특사로 보내는 등 극비리의 외교전을 통해 ‘죽의 장막’을 열었다. 1949년 냉전 초 중국이 공산화하자 중화민국(대만)만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적대한 미국이었다. 6·25전쟁, 1·2차 대만해협 위기 등을 겪으며 미·중의 사이는 멀어져만 갔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중소(中蘇) 관계가 악화하자 닉슨은 이를 지정학적 기회로 봤다. 중국을 끌어당겨 소련을 견제하려 했다. 과거에 매몰됐다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었다. 지금과 앞으로의 국익에 집중한 결정이었다. 1972년 닉슨의 방중, 마오쩌둥 초대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 그리고 미·중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합의를 담은 ‘상하이 코뮈니케(공동성명)’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고, 이는 닉슨의 유산이 됐다. 닉슨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에 그의 결단은 더욱 빛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반일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왔다. 성남시장 시절 “일본은 군사적으로 적성(敵性)을 해소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고, 민주당 대표 때는 한·미·일 훈련을 비난하며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 욱일기가 한반도에 다시 걸리는 날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강제 징용 배상 등 과거사와 관련해서도 “부당한 역사 침략에 대해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전면전을 선포해야 한다”고 했다. 더한 말도 했다.

그랬던 이 대통령이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대일 정책에 ‘실용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하고, 지난 17일 한일 정상회담에선 “한일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집”이라며 ‘미래 지향적 관계’를 맺자고 했다. 외교가는 ‘어? 뭐지’ ‘뜻밖인데?’라는 반응이면서도 ‘좀 더 지켜보자’며 일단 팔짱을 끼고 있다.

강경파가 유화책을 쓰면 ‘진심으로 보이는 효과’가 생겨 협상력과 추진력이 배가(倍加)된다는 게임이론이 있다. 조셉 나이 전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소프트파워’에서 “반공주의자 닉슨이었기에 미·중 수교라는 대담한 외교적 전환에도 정치적 비용이 적었다”고 했다. 박정희였기에 1972년 그 시대에 7·4 남북 공동성명이 나왔다. 이 대통령이 위성락 안보실장을 키신저처럼 삼아 대일 데탕트의 문을 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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