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에도 남북 교류 가능한 분야는
北주민 고충 더는 생활밀착 지원
인도적 약품 지원 北 영유아 사망률 낮춰
상수도 개선·민둥산 복원·공동 채소온실
지속가능발전 가치 바탕 생태·환경 협력
정치 논란서 자유로운 이슈 모색
평창 남북단일팀 남북대화 마중물 돼
기후변화·감염병 국제이슈도 협력 여지
이산가족 27%만 생존… 상봉 서둘러야
李대통령 ‘END’ 시작은 대화·교류
정부, 민간단체 6곳 대북 접촉 승인
“군사 이슈 피해 사회·경제 교류 먼저
北에 확고한 억제력 보여주기 병행을”
북한이 남북관계를 ‘통일을 향한 잠정적 특수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모든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대북 대화와 교류를 재개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북한 핵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유화 정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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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차량들이 북한을 향해 가고 있다. |
이런 관점에서 주목을 받는 것이 인류 공통의 가치라 할 수 있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남북관계 형성을 위한 교류 로드맵을 논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통일연구원은 지난해 2월 ‘새로운 남북관계 형성을 위한 SDGs 협력 방안’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SDGs 체계 하에 남북이 공동으로 생태·환경 분야 협력을 추진할 경우 제재 환경 속에서도 일정한 협력 여지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환경, 보건, 농업 분야가 우선순위로 꼽히고 경제·문화 교류를 늘려가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으로서도 고민일 수밖에 없는 북한 주민의 일상적 고충을 덜어줄 수 있는 지원을 하고 상호주의적 협력을 통해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다.
◆자율성 높고, 효과 큰 보건·의료
의약품·의료장비 지원 등은 국제 제재에서 자유로운 분야다. 북한 보건의료 취약지역에 의료 지원에 나서 볼 수 있다. 대한적십자사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 민간단체가 협력해 북한에 결핵약, 분만키트, 아동영양제 등을 2015년 지원한 사례가 있다. 남북교류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협력 창구가 됐고 효과도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0년 대비 2015년 북한의 영유아 사망률은 약 12% 감소했다. 2014∼2015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대한적십자사가 평양 외곽 주민 약 1만명에게 식수 공급망을 제공했다. 이러한 생활 협력 형태의 상수도 개선 지원사업 등을 검토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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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축산 협력은 기부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자립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경기도가 추진했던 ‘개풍 양묘장’ 사업은 대표적인 모델로 꼽을 수 있다. 식량 확보를 위해 계단밭을 만들면서 민둥산으로 바뀐 북한에는 홍수 피해가 크다. 홍수와 산사태에 대비하면서 생태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남북이 협력할 여지가 있다. 특히 양묘장을 시작으로 숲을 복원하는 야심 찬 사업으로 키워 볼 만하다. 씨감자와 채소를 키우는 공동온실을 만드는 것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남북은 2005∼2007년 개성과 강원도 금강군 일대에 공동 채소 온실을 만들었다. 남한에서는 기술지원을, 북한에서는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했다.
◆평창 단일팀의 재연 예체능·종교
정치적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에서 본격적 교류에 선행해 남북이 손을 맞잡았던 것이 예술·체육 분야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단일팀이 구성돼 남북 선수들이 힘을 합쳐 경기를 치렀던 것은 향후 남북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는 마중물이었다. 한반도에 평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물론이다. 민간 차원에서 음악제, e스포츠 친선전 등 분야를 넓히는 것도 방법이다. 종교계 교류는 꾸준히 이어졌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논의가 무산되어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2019년 조계종은 개성 영통사 복원 논의를 다시 시작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평화기도회’를 열어 북측 종교단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런 교류 또한 비공식적이고 비정치적인 소통 채널이 될 수 있다.
◆지역·생태 관광 노려볼 만한 경제·관광
경제 협력은 제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이지만 인도적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관광사업은 시도할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1998년부터 약 10년간 이어온 금강산관광은 약 195만명이 방문하면서 지역경제에 연간 1억달러(약 1430억원) 이상의 효과를 냈다. 지역 관광이나 생태 관광 중심으로 소규모 재개를 고려해 볼 만하다.
제주도의 양돈산업발전협의회가 2019년 북한에 흑돼지 공동단지 제안을 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사례다. 민화협은 이를 수용해 농축산교류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남북이 협력해 사업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지방정부와 민간협의회 간 다양한 협력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남북교류 확산의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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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북한 응원단이 한반도기를 펼치며 응원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기후변화는 한반도를 공유하는 남북에 공동으로 시급한 이슈인 만큼 협력 가능성이 열려 있다. 북한도 자발적국가리뷰(VNR)에서 기후변화 부문에서는 국제협력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감염병 부문에서 공동 대응 체계 마련을 모색해 볼 만하다. 2018년 남북은 보건의료 분과회담으로 감염병 정보를 교환하기로 합의하고 시범 교환까지 나선 적이 있다. 임진강 수문 개방 통보 체계를 복원하는 등 국민 보호 차원에서 필요한 실용적 협력부터 재개하는 것이 순서로 평가된다.
◆미룰 수 없는 이산가족 상봉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난 8월 기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 13만4000명 중 국내에 생존한 사람은 3만5311명에 불과하다. 73.4%인 9만9178명은 숨졌다.
남북이 물리적으로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2005년 도입했던 화상 상봉 시스템을 계속 운용하는 방법이 있다. 2007년까지 약 550가족이 상봉했다. 이산가족이 고령화하는 만큼 편리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남북 공동으로 온라인 추모관을 조성할 수도 있다. 생존자 명단, 가족사진, 영상 메시지를 등록해놓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직접 소통하지 못하더라도 생사를 확인하고, 정서적으로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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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 차량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
대북 대화통로가 꽉 막힌 상황에서 이재명정부는 지난 6월 민간단체 6곳의 대북 접촉을 승인했다. 민간 차원에서 남북 소통 채널을 복구하고 대화 협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민간교류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지난달 경기 연천 국립통일연구원을 찾아 “장기간 단절·경색된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기 위해 민간 차원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재명 대통령의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뜻하는 ‘END 이니셔티브’와 관련해 “세 가지 중 맨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이 대화이고, 교류”라고 역설했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거부하지 않을 의제를 섬세하게 선택해 접근해야 한다”며 “국제기구나 중국·러시아를 통한 다자 채널”을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북·중 간 비공식 교역이 활발한 지금 실질적 기능이 상당 부분 제약되는 국제 제재를 일부 완화하는 것도 북한의 체면을 세워 주며 협상을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이 수석연구위원은 관측했다.
북한과의 접근에서 통일부, 국가안보실, 국방부 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가며 관련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통일부 목소리만 보면 속도가 빠르다고 느낄 수 있지만 (현재는) 범정부 차원에서는 전체적인 조율 단계로 보인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