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갔다오면 빚 없애줄게"…26살 청년의 캄보디아 악몽

성주원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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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매장 안 간 것뿐인데 6500만원 빚쟁이로
"고급호텔 체류하며 계약서만 받아오면 된다" 속여
여권 빼앗고 고문 영상…"이게 너의 최후다" 협박
1심, 20대 피고인 3명에 징역 3년6월~10년 선고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캄보디아 고급호텔에서 2주 동안 머물다가 오면 된다. 캄보디아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로부터 사업 관련 계약서를 받아오면 네가 갚아야 할 3000만원을 탕감해 주겠다.”

지난 1월 황모(26)씨가 받은 제안이었다. 친구인 김모(27)씨가 같이 간다고 했다. 고급호텔에 머물며 서류만 받아오면 빚을 없앨 수 있다니, 황씨는 혹했다.

하지만 이는 황씨를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조직에 넘기기 위한 치밀한 거짓말이었다. 황씨는 24일간 캄보디아 범죄단지를 전전하며 고문 영상 협박에 시달렸다.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됐다.

캄보디아 온라인 사기에 가담해 구금된 한국인들이 지난 1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이날 송환에는 경찰 호송조 190여명이 투입됐다. (사진=공동취재단)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재판장 엄기표)는 이날 국외이송유인 등 혐의로 기소된 신모(26)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공범 박모(26)씨에게는 징역 5년, 김씨에게는 징역 3년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BMW 매장 안 갔다고…하루아침에 6500만원 빚쟁이

사건은 지난해 12월 초 시작됐다. 신씨는 박씨에게 “수입차량 차대번호를 알아내 해외 딜러에게 전달하면 구매금을 받을 수 있다. 1인당 몇천만원씩 가져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박씨는 지인 황씨에게 텔레그램으로 연락했다. “서울 용산구 BMW 매장에 가서 차대번호를 알아와라.” 하지만 황씨는 이 일을 거절했다. 약속된 날짜에 BMW 매장에 가지 않았다.

신씨는 격분했다. 박씨에게 텔레그램으로 “너희가 약속한 날짜에 매장에 가지 않아 수입차량 고유코드 해킹비용과 진행비용 합계 6500만원을 손해봤다. 이를 물어내야 한다”, “잡히면 죽인다. 잡는 거 하루 이틀도 걸리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박씨는 6500만원 채무를 인정하는 금전소비대차계약 공정증서를 작성해야 했다. 황씨를 소개한 김씨에게도 “너도 박씨와 한패다. 함께 6500만원을 갚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채무 탕감해줄게”…치밀하게 짠 함정

박씨와 김씨는 6500만원을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때 신씨가 제안했다. “황씨 때문에 손해가 발생했으니 황씨를 캄보디아로 보내야 한다. 황씨에게 캄보디아 호텔에 머물다 오면 채무를 탕감해주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네가 갚아야 하는 6500만원 채무를 탕감해주겠다.”

그러면서 김씨에게는 “황씨와 캄보디아를 같이 다녀와라. 도망가는 애들이 있을 수 있다. 같이 가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 1월 초 황씨에게 텔레그램을 통해 “네가 약속한 시간에 용산 수입차량 매장에 가지 않아 6500만원을 손해 보는 상황이 생겼으니 네가 절반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캄보디아 고급호텔에서 2주 동안 머물다가 오면 된다. 캄보디아에 카지노가 잘 되어 있으니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관광사업을 추진할 것인데, 캄보디아 체류 중인 한국인들과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연락을 하는 동안 호텔에 머물고 있다가 사업 관련 계약서를 받아오면 된다. 그렇게 하면 네가 갚아야 할 3000만원을 탕감해 주겠다. 김씨와 같이 다녀와라”고 제안했다.

황씨는 주저했다. 인터넷으로 캄보디아를 검색해보니 살벌한 이야기가 많았다. 김씨에게 “캄보디아 가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히려 “캄보디아 가지 말고 그냥 아버지가 있는 부산으로 가라. 거기 차라리 숨어 있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황씨는 결국 1월 13일 김씨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에서 캄보디아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친구가 같이 간다는 말에 안심했다.

도착하자마자 조직 인계…여권 빼앗고 감금

1월 14일 새벽(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공항에 도착했다. 신씨가 텔레그램으로 택시 사진을 보냈다. “이 택시를 타라.” 호텔에 도착하자 또 메시지가 왔다. “누군가 마중을 나갈 것이니 기다려라.”

얼마 후 조직원들이 나타났다. 일명 ‘대표’, ‘은우실장’, ‘이실장’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황씨와 김씨를 택시에 태워 캄보디아-베트남 국경 인근 ‘파라곤 카지노’ 앞으로 데려갔다.

새벽 3~4시경이었다. 경비원들이 지키는 담벼락과 철조망을 지나 숙소 106호에 들어갔다. 조직원들은 황씨의 휴대전화와 여권, 신분증을 모두 빼앗았다. 황씨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김씨는 이틀 후 조직원들로부터 150만원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황씨만 남았다.

계좌 보이스피싱 이용…고문 영상 보여주며 협박

조직원들은 황씨의 휴대전화에서 유심칩을 빼내 자신들의 휴대전화에 장착했다. 황씨의 케이뱅크 계좌로 입금된 돈을 조직원 계좌로 빼돌렸다. 보이스피싱으로 피해자들을 속여 황씨 계좌로 돈을 입금하게 한 뒤 빼가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케이뱅크가 지급정지 조치를 했다. 계좌에 약 1000만원이 묶였다.

조직원 ‘은우실장’은 1월 16일 저녁 황씨를 숙소 3층으로 불렀다. “네 통장이 막혔으니 케이뱅크에 전화를 해라”면서 끔찍한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다 우리 돈을 사고치거나 도망치다가 걸린 사람들의 최후다. 너도 도망치다가 걸리면 이렇게 된다. 얌전히 있어라”고 협박했다.

황씨는 공포에 떨었다. 이후 10일 넘게 그곳에 갇혀 있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캄보디아 온라인스캠범죄단지인 ‘태자단지’ 운영 등 조직적 범죄의 배후로 알려진 프린스그룹에서 운영하는 프린스 은행.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에서 온라인 금융 사기와 인신매매, 불법감금 및 고문 등을 주도한 혐의로 미국·영국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사진=뉴스1)
프놈펜-시아누크빌 전전…부모에게 돈 요구

1월 26일 조직원 강모씨가 황씨를 차에 태웠다. 프놈펜 시내 ‘더브릿지 호텔’로 이동했다. 다시 시아누크빌 소재 보이스피싱 범죄단체 근거지로 옮겼다. 2월 1일 다시 ‘더브릿지 호텔’로 돌아왔다.

조직원 ‘대표’가 황씨에게 또 다른 영상을 보여줬다. 채찍이나 끓는 물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계좌 지급정지 조치 때문에 네 케이뱅크 계좌에 묶인 1000만원과 장값 명목으로 지불한 1000만원 등 합계 2000만원을 갚아야 집에 보내주겠다.”

“공항으로 도망을 간다고 해도 그곳에 다 우리 사람이 있으니까 너희 정보가 다 우리한테 온다.”

한편 신씨와 박씨, 김씨는 한국에서 텔레그램으로 조직원들과 연락하며 황씨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다. “황씨를 꺼내주겠다”며 금품을 뜯어내려 한 것이다.

24일 만에 대사관이 구출…법원 “죄질 매우 나쁘다”

황씨는 24일간 캄보디아 곳곳을 옮겨다니며 감금됐다. 2월 5일 오후 5시경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더브릿지 호텔’을 찾아왔다. 황씨는 그제야 탈출할 수 있었다.

검찰은 보완수사를 통해 신씨, 박씨, 김씨가 황씨를 유인해 조직에 인계한 사실을 밝혀내고, 지난 5월 이들을 구속기소했다.

재판부는 “범행 목적과 경위, 조직적 분담 등에 비추어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피해자가 제때 구출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감금당하였을지, 어느 정도의 추가적인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씨에 대해서는 “공범들을 협박해 범행에 가담시키고 실행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시했다”며 “처음부터 피해자가 캄보디아 범죄조직에 의해 상당 기간 감금되리라는 사정을 알면서 피해자를 국외로 이송했다”고 판단했다.

박씨와 김씨에 대해서는 “신씨의 부당한 협박으로 마지못해 범행에 가담한 점은 참작된다”면서도 “가담 정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히 박씨에 대해 “피해자를 캄보디아에 가도록 만들기 위해 한 신씨의 제안이 허위의 사실일 가능성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음에도 피해자에게 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망해 착오에 빠뜨렸다”고 꼬집었다.

김씨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캄보디아에서 하게 될 일에 대해 호텔에 2주간 체류하다 계약서를 받아오는 일이라고만 알았을 뿐 자기 명의 통장을 보이스피싱 등 사기 범행에 이용되도록 제공하는 행위인 줄은 몰랐다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을 신빙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친구인 김씨가 캄보디아에 함께 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되어 캄보디아로 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씨의 행위는 피해자가 캄보디아에 가기로 하는 결심을 유도 및 강화한 유인행위의 일환”이라고 판시했다.

지난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에서 지난 8월 캄보디아 보코산 지역 온라인스캠범죄단지에 감금, 고문 끝에 숨진 대학생 박모씨(22) 유해가 송환되고 있다.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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