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도 은퇴전문가 |
은퇴를 ‘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을 일하며 모은 돈을 이제는 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무설계의 관점에서 은퇴는 종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 재무의 ‘리밸런싱(Rebalancing)’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앞으로의 30년, 즉 인생 2막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의 핵심은 자산 규모가 아니라 현금흐름(Cash Flow)에 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월급이라는 일정한 현금흐름이 존재한다. 매달 들어오는 급여 덕분에 소비 리듬이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재무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은퇴와 함께 이 구조가 무너진다. 수입은 끊기거나 불규칙해지고, 지출은 오히려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여행, 취미, 자녀 지원, 건강관리 등 그동안 미뤄왔던 욕구들이 한꺼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은퇴생활의 안정성은 ‘얼마를 모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꾸준히 들어오는가’로 결정된다.
퇴직 직후 많은 은퇴자들이 첫 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퇴직금을 목돈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부동산 매입, 고위험 투자, 혹은 장기예금에 묶어두는 식의 일회성 결정이 많다. 문제는 그 자산이 현금으로 얼마나 쉽게 전환될 수 있느냐이다. 시장 상황이 나빠질 때, 혹은 건강 문제로 지출이 급증할 때 현금흐름이 막히면 은퇴의 삶은 불안해진다. 장부상 자산이 아무리 많아도 생활비로 쓸 수 없다면 그것은 ‘숫자에 불과한 자산’일 뿐, 진짜 은퇴자금이 아니다.
따라서 은퇴 후 재무설계의 출발점은 ‘총자산표’가 아니라 ‘현금흐름표’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임대소득, 배당금 등 정기적 수입을 한쪽에, 생활비·보험료·의료비·여가비 등 지출을 다른 쪽에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수입이 지출을 초과하느냐가 아니라, 그 흐름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가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리밸런싱’이다. 은퇴 후에도 자산은 여전히 움직인다. 시장의 변화, 건강 상태, 가족의 상황, 소비 패턴 모두가 끊임없이 바뀐다.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이나 배당형 상품으로 옮기거나, 일부를 생활비용으로 전환하는 식의 점검이 정기적으로 필요하다. 리밸런싱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격적 전략이 아니라, 은퇴 이후의 생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적 조정이다.
리밸런싱과 함께 중요한 개념이 ‘인출 전략’이다. 단순히 일정 금액을 매달 쓰는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과 개인의 지출 패턴에 따라 유연하게 인출 금액을 조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연 4% 인출률이 권장되지만, 이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은퇴 초기에는 활동량이 많아 지출이 늘고, 후반기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즉, 은퇴 후 재무설계의 핵심은 “언제, 얼마나 쓰는가”를 미리 설계하고 조정하는 데 있다.
또한 현금흐름의 설계는 심리적 안정과도 직결된다. 불확실한 시장 상황 속에서도 ‘들어오는 돈이 일정하다’는 확신은 삶의 리듬을 유지하게 한다. 반대로 자산이 많아도 언제, 어떻게 쓸지 불안하면 삶의 질은 떨어진다. 재무설계는 단순한 숫자 계산이 아니라, 은퇴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보장체계를 효율적으로 연계해 ‘평생 월급’을 만드는 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배당주, 채권, 임대소득 등 안정적 현금흐름 자산을 결합하면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꾸준한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산을 분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흐름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다.
결국 은퇴설계의 본질은 돈을 모으는 기술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기술이다. 자산은 언젠가 줄어든다. 그러나 현금흐름은 관리할 수 있다. 흐름을 조정하면 삶의 안정도 따라온다. 은퇴는 단절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다.
이제 은퇴를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바라봐야 한다. 자산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흐름을 유지하는 힘이다. 진정한 은퇴의 경쟁력은 ‘얼마나 모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현명하게 흘려보내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 2막의 재무설계는 결국 돈의 숫자를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속도를 조율하는 일이다.
박상도 은퇴전문가·前 농협중앙회 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