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돈, 남겨진 흔적 블록체인의 투명한 역설

정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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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세종
황현일 변호사·이재훈 회계사




가상자산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이유는 대부분 ‘익명성’ 때문이다. 텔레그램 성착취물 사건, 마약거래, 랜섬웨어 공격 등에서 범죄자들이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대가로 요구하면서, 많은 이들이 가상자산을 자금 추적이 불가능한 탈법의 수단으로 오해하게 됐다.

그러나 가상자산의 거래기록은 ‘눈 덮인 길 위의 발자국’처럼,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반드시 남는다.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모든 거래를 위·변조 없이 기록하고, 그 기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보이지 않는 돈이지만, 그 흐름은 결코 감춰지지 않는다.

돈의 흐름은 범죄의 전모를 밝히는 핵심 단서다. 수사기관은 법정화폐의 거래를 추적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범죄에 사용된 계좌를 특정하고 피의자를 확인한 뒤, 법원에 ‘계좌추적 영장’을 청구하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다. 하지만 영장을 발부받기 위해서는 ‘혐의 상당성’에 대한 소명이 필요하며 수사 초기에는 이를 입증하기 어려워 자금 추적이 늦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설령 영장을 확보하더라도 현금 입출금이 개입되는 순간 추적은 끊긴다. 수표 바꿔치기, 상품권 거래, 카지노 칩 교환 등 자금세탁 수법이 횡행하고, 여기에 차명계좌나 해외금융기관 계좌가 동원되면 추적은 복잡한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반면, 가상자산 거래는 모두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이른바 ‘온체인(On-Chain)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이유다. 블록체인의 불변성과 공개성 덕분에 누구든 크립토머스나 이더스캔 같은 플랫폼을 통해 정확한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지갑 주소가 범죄에 연루된 단서만 확보되면 그 지갑이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즉시 추적 가능하다. 은행별로 영장을 받아 일일이 자료를 모으던 방식과 비교하면, 자금의 흐름이 훨씬 신속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블록체인에 공개되는 정보는 60자 내외의 지갑 주소뿐이며 그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금융계좌가 실명 확인 절차를 거치지만, 가상자산 지갑은 별도의 인증 없이 누구나 생성할 수 있다. 중앙화거래소(CEX)를 통해 현금화가 이뤄지는 경우에는 고객확인제도(KYC)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지만, 탈중앙화거래소(DEX)나 믹서(Mixer)를 이용하면 끝까지 실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모네로(XMR) 같은 다크 코인은 송금자 본인이 아니면 거래 내역을 파악하기조차 힘들다.

결국 가상자산의 자금 추적은 온체인 데이터(거래기록)와 오프체인 데이터(거래소의 고객정보)가 결합될 때 완성된다. 실제로 텔레그램 성착취물 사건 당시 국내 주요 거래소들은 수사기관의 협조 요청에 신속히 대응해 지갑 소유자 확인과 거래 내역 제공을 통해 혐의자 검거에 기여했다.

가상자산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발자취는 결국 범죄자를 향해 이어지고, 수사기관이 의지를 갖고 접근한다면 추적은 충분히 가능하다. 익명성을 기반으로 탄생한 기술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장부’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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