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이른바 '국가안보 자본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미 정부가 특정 전략 산업의 주요 기업의 지분을 직접 소유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다. 기존 보조금과 세제 혜택으로 관련 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을 뛰어넘는다. 자유 시장의 효율성보다 국가 안보와 공급망 회복력을 우선시하는 국가 정책의 전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국방부(DoD)는 지난 7월 상장 희토류 기업 'MP 머티리얼스'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국방부는 총 9억 달러(지분투자 4억 달러, 대출 1.5억 달러, 추가 옵션 3.5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MP 머티리얼스의 우선주 전환 및 워런트 행사 시 약 15%의 지분을 확보해 사실상 최대 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올해 들어 트럼프 행정부는 US스틸을 비롯해 인텔, 트릴로지메탈스 등의 정부 지분도 확보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식 산업정책 모델을 일부 도입해 국가안보와 직결된 핵심 기업에 정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생산·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구상”이라고 분석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15일 CNBC가 주최한 포럼에 참석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7개 산업을 지정해 정부의 직접 통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NYT는 “7개 전략산업에는 방위산업, 반도체, 희토류, 항공기, 첨단무기, 배터리, 핵심 소재 산업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미 국방부와 머티리얼스 파트너십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미국의 국가안보 자본주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일부 업종에서 '시장 조성자(Market-maker)'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향후 미국 정부가 반도체, 방산, 배터리 등 다른 전략 산업에 개입할 방식도 예측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닌 직접적인 소유권 확보다. 모든 우선주 전환(전환가 30.03달러) 및 워런트 행사 시 국방부는 약 15%의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국방부를 잠재적 최대 주주 위치에 올려놓는다.
다음은 부채 금융. 국방부는 MP 머티리얼스의 중희토류 분리 및 가공 능력 확대를 위해 1억 5000만 달러의 대출을 약정했다. 이는 국방부가 지분 투자자일 뿐만 아니라, 특정 기술적 병목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자금을 공급하는 채권자의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부가 후순위 대출자로 참여해 프로젝트의 신용도를 보강했고, 민간 자본 유인의 마중물 효과가 나타났다. JP모간과 골드만삭스는 이 파트너십 발표 직후 MP 머티리얼스의 신규 사업에 10억 달러의 대출 약정을 체결했다.
가장 강력한 지원은 수요 보장이다. 미국 국방부는 MP 머티리얼스가 신설할 '10X' 공장에서 만든 모든 희토류 자석을 향후 10년간 모두 구매하기로 약정했다. 이는 기업 활동의 가장 큰 리스크인 수요 변동성을 국가가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국방부가 최종 수요자이자 초기 시장을 열어주는 일명 '앵커 바이어' 역할을 수행한다.
주목할 점은 국방부가 구매한 물량을 상업 고객에게 최대 100%까지 재판매할 수 있는 옵션도 포함했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가 미국 내 희토류 자석 시장 전체의 수급을 조절하는 '시장 조성자' 역할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장 혁신적이고 시장 왜곡적인 장치로 가격 보장이 꼽힌다. 미국 국방부는 네오디뮴과 프라세오디뮴의 합성물은 NdPr 산화물에 대해 10년간 킬로그램당 110달러의 최저 가격을 보장하기로 했다. 사실상 미국 납세자가 보증하는 '풋옵션'을 제공한 것과 같다.
해당 계약을 맺은 7월 당시 시장 가격은 킬로그램당 약 63달러 수준이었다. 110달러라는 하한선과 차이가 크다. 이는 중국의 가격 덤핑이나 시장 변동성으로부터 회사의 수익성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 계약은 사실상 ‘차액결제계약(CfD·Contract for Difference)’과 비슷한 구조다. 시장 가격이 11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국방부가 그만큼의 손실을 메워준다. 반대로 가격이 110달러를 넘으면 초과분의 30%를 국방부가 가져간다. 여기에 더해 10X 공장이 가동된 뒤에는 매년 인플레이션 2%를 반영해 최소 1억4000만 달러의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을 보장받는다.
모건 스탠리의 카를로스 데 알바 애널리스트는 "미 국방부가 제공한 이번 포괄적 자금 지원·조달 패키지는 장기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사실상 제거한다"며"덕분에 MP 머티리얼스는 단순한 희토류 가공업체를 넘어, 채굴부터 완제품 자석 생산까지 아우르는 완전 통합형 제조기업으로의 전환 속도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DPA는 한국전쟁 당시 제정된 법이다. 대통령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민간 산업을 동원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한다. 최근 적용 범위가 공급망 재편과 첨단 기술 육성을 위한 직접 투자로까지 확대됐다. MP 머티리얼스 건은 국방부가 단순 구매자를 넘어 투자자로 변신할 수 있었던 근거다.
이런 비전을 실행하는 두뇌 역할을 하는 곳이 2022년 설립된 OSC다. OSC는 국방부가 미국 월스트리트의 언어와 방식으로 민간 금융 시장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대출, 대출 보증, 지분 투자 등 정교한 금융 수단을 활용해 민간 자본이 주저하는 '죽음의 계곡' 구간에 있는 국가 기술 기업들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임무다.
미 국방부의 '2025 회계연도 OSC 투자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OSC의 목표는 경제 네트워크의 병목점통제와 핵심 산업 내 리더십 확보다. 중국의 희토류 독점이라는 명백한 병목점을 통제하려는 MP 머티리얼스 거래의 목표와 일치한다.
미국 정부가 특정 자산을 '무위험'으로 만들면서 관련 산업 전반으로 그 여파가 확산했다. 국방부가 제시한 킬로그램당 110달러라는 가격 하한선은 희토류 시장의 새로운 기준점이 됐다. 컨설팅 업체 프로젝트 블루는 비중국 공급을 지지하는 인센티브 구간을 NdPr 킬로그램당 75~105달러로 추산했다.
국방부의 보장 가격은 이 상단의 위에 있다. 미 국방부의 딜 공개 직후 MP 머티리얼스 주가는 프리마켓에서 41% 급등했다. 희토류 섹터 전반의 랠리도 이끌었다.
미 정부의 강력한 지원은 민간 부문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미국 내 희토류 산업 생태계 전반을 활성화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애플은 5억 달러 규모로 MP 머티리얼스의 미국 제조 희토류 자석을 구매하기로 했다.
미국 내 다른 희토류 기업들도 생산 능력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USA 레어 어스'(USAR)는 오클라호마 스틸워터에 연간 5000톤 규모의 소결 네오디뮴 자석 공장을 건설 중이다. 노베온은 미국 텍사스 공장(연간 2000톤)에서 이미 소결 NdFeB 자석 생산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GM에 납품을 시작했다. 8월부터는 ABB 북미 공장에도 납품을 시작했다. '펜타곤 주식회사' 모델은 미국의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자본 시장의 효율적 배분을 왜곡하고 '정실 자본주의'를 심화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민간 자본은 정부가 '안전하다'고 신호를 보내는 곳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희토류, 차세대 반도체, 양자 컴퓨팅, 극초음속 무기 부품 등 국방부 OSC가 지정한 '전략 기술' 분야에는 자금이 넘쳐흐를 것이다.
반면 일반 소비재나 전통 제조업, 일부 서비스업처럼 국가 전략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산업은 상황이 다르다. 이들 분야는 국방·에너지처럼 위험 대비 수익률을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자본 조달 비용에 직면하거나 아예 투자 유치 자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자본의 쏠림은 단순히 특정 산업을 키우는 수준을 넘어선다. 정부가 신용을 보강해주는 산업의 자산 가치는 급등하고, 그 과정에서 거품이 형성될 수 있다. 반대로 정부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산업은 잠재력이 있어도 자금이 끊기며 쇠퇴할 위험에 놓인다.
결국 시장이 스스로 유망 산업을 골라내는 기능이 약화하고, 정부의 판단이 자본 배분의 효율성을 좌우하는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 전반의 ‘신용평가기관’ 역할을 맡게 되는 셈이다. 앞으로 기업의 가치는 시장 경쟁력뿐 아니라 정부로부터 ‘전략 산업’으로 지정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 깊어질수록 불가피하게 '정실 자본주의'가이 생길 수 있다. 기업의 성패가 혁신이나 효율성 같은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워싱턴 D.C. 권력 핵심부와의 인맥에 달리게 되는 구조다. 이른바 ‘펜타곤 주식회사’ 모델은 이런 왜곡된 권력-자본 결합을 촉진할 수 있다. 정부와 방산 네트워크에 기대어 움직이는 ‘벨트웨이 밴딧(정부 예산에 기생하는 계약업체들)’들이 다시 부상할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도 프로젝트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희토류 산업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환경 규제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 실행 과정에서 다양한 리스크가 존재한다. 특히 채굴에서 정제, 분리, 금속화, 최종 자석 생산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밸류체인을 단기간 내에 구축하고 안정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펜타곤 주식회사' 모델은 세계무역기구(WTO) 규범과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특정 국내 기업에만 배타적인 혜택을 주는 것은 최혜국대우(MFN) 원칙과 내국민대우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 WTO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ASCM) 위반으로 제소될 수도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한국엔 피할 수 없는 도전이 될 전망이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방산 등은 이 새로운 경쟁의 규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펜타곤 주식회사' 모델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한국 기업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대표 기업'들은 이제 자본 조달 비용이 거의 없고, 수요와 수익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는 원가 경쟁력과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해 온 한국 기업들의 근본적인 경쟁 우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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