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수만대 1 과거制처럼 기업 관리하는 中공산당

윤성민 기자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수백개 기업 경쟁 유도한 뒤
생존 소수만 키우는 中의 육성책
'지옥 관문' 옛 과거제 연상시켜

공산당 주도로 성장한 레드 테크
경제안보전쟁의 첨병으로
우리는 어떻게 '항전'할 것인가

윤성민 수석논설위원
중국 명조 초기 수도 난징의 과거 시험장인 장난공원(江南貢院)은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의 두 배 넘는 규모에 2만 개의 시험실이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크기에 문도 없는 시험실마다 한 명씩 시험을 보는데, 양쪽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판을 책상 삼아 답안지를 쓰고 밤에는 침대 삼아 새우잠을 잔다. 이렇게 아흐레 동안 갇혀 시험을 치르는 말 그대로 ‘지옥 관문’이다.

장난공원은 성 단위(명 때는 14개)로 보는 향시 고사장 중 가장 큰 곳이다. 향시는 동생시라는 지방 인재 시험에 합격해야 볼 수 있고, 향시를 통과하면 회시, 이어 황제 앞에서 보는 전시로 이어진다. 전시에 급제하면 고위 관리로 등용되는 진사 학위를 받는다. 수만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엘리트 공무원 교육기관 격인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평생의 삶이 보장되는 고관 길에 들어서게 된다.

중국 레드테크의 성장 과정도 과거제도의 살인적 경쟁 구조와 닮은 데가 많다. 중국 전기차(하이브리드카 포함) 브랜드는 BYD를 포함해 129개가 있다. 전기차의 부품 수가 내연기관차보다 40%가량 적다고 해도 한 나라에 이렇게 많은 차 브랜드가 시장에 나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당국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며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다. 정글 같은 경쟁 환경에서 향후 5년 내 생존할 확률은 10% 정도다. 세계 2위 풍력발전 기업 엔비전은 무한 경쟁 끝에 중국 챔피언에 오른 경우다. 2021년까지만 해도 엔비전과 치킨 게임을 벌이던 300여 개의 경쟁 업체 대부분은 퇴출당했다. 현재 중국에는 제2의 스페이스X를 꿈꾸는 민간 우주업체만도 430곳에 달한다.

중국 제조업 굴기의 리더는 중국 공산당이다. 미국 주도에 맞서 기술·공급망 자립과 세계를 지배할 거대 하이테크 기업 육성 프로그램의 기획·설계자다. 돈을 풀어 내수 시장에서 수백 개 기업을 난립시킨 뒤 ‘쭉정이’가 걸러지면 살아남은 에이스들에 집중 투자해 세계 정상으로 키우는 전략이다. 기업들은 당의 간택을 받기 위해 수만 대 1을 뚫어야 하는 전시 급제자처럼 극한 경쟁을 벌인다. 중국 민간 기업들이 근무시간을 얘기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996(오전·오후 9시 출퇴근, 주 6일 근무)이다. 전기차 배터리 1위 기업인 CATL은 바이두가 맹추격하자 896(오전 8시 출근)으로 근무 체제를 바꿨다. 그러자 바이두의 한 임원은 “24시간 휴대전화를 켜놓고 항상 회신할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중국의 법정 노동시간은 주당 44시간에 월 36시간의 초과 근무가 가능한 것으로 돼 있지만, 이는 규정상일 뿐 현실에선 996·896과 함께 연구개발(R&D)직엔 007(0시~0시까지, 주 7일)이란 표현까지 있다.

그래도 공산당은 공산당이다. 중국 공산당의 ‘당-국가 주도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기업을 길들일 아주 명확한 인센티브-징계 구조가 있다. 탁월한 역량에 충성심과 공산당 이념에 부합하는 곳에는 확실한 당근이 주어진다. 중국 공산당은 수백만 개 민간 기업에 세포조직을 심어 놓고 통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공산당의 지원 대상이 되면 직접적 자금 지원에 세금 감면, 저리 대출, 증시 상장, 해외 진출 및 경쟁 보호 등에서 ‘찐한’ 혜택을 받는다. 반대로 역량은 뛰어나도 충성심과 이념적 잣대에서 눈 밖에 나면 철퇴가 가해진다. 과거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쫓겨났던 것처럼, 적잖은 스타 기업인들이 ‘양봉음위’(陽奉陰違:겉에선 공산당을 받드는 척하며 뒤에선 딴짓함)죄로 의문사하거나 영구 행방불명됐다.

중국 내 비즈니스 환경은 기업들에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다. 노동시간 규제,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같은 환경규제, 노란봉투법 같은 파업 리스크, 직장 내 괴롭힘이나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인권 및 작업장 제약에서 상당히 자유롭다. 거기에 그들이 중국 공산당 기조에 동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기업과 기술을 경제안보 전쟁의 핵심 수단으로 보는 공산당에는 해외 데이터 수집이 정보전의 기본 자산이다. 우리는 이런 조직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국민성장펀드와 같은 물적 기반만이 아니라 사회 의식구조가 항전 태세로 바뀌어야 한다. 레드테크 공습에 국가 경쟁력, 산업 생태계, 안보 모든 측면이 위기에 놓여 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