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나온 지 60년이 넘은 프로그래밍 언어인 코볼 개발자의 대거 은퇴를 앞두고 있어서다. 이런 우려로 IT 시스템 현대화 시장이 최근 크게 성장하고 있다. 3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회계감사원(GAO)은 지난 7월 관련 보고서를 통해 현대화가 필요한 11개의 핵심 레거시(구식) 정보 기술(IT) 시스템을 지목했다. 이 중 일부는 수십 년 이상 된 기술(최대 60년)로 운영되고 있다. 해당 시스템은 현재 미국의 핵심 행정 서비스의 바탕이다. 코볼 등 노후 코딩 언어 사용했다. 특히 세금 징수 및 처리를 담당하는 미국 재무부의 핵심 시스템 2개가 코볼과 어셈블리어로 구축됐다.
GAO는 "코볼 등 이런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를 확보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환경보호청(EPA)의 시스템에는 제조업체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구형 하드웨어가 포함돼 있고 현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사이버 보안 취약점도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영국 은행 바클레이즈는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3일간 메인프레임 처리 성능의 심각한 저하로 광범위한 서비스 장애를 겪었다. 해당 시스템 변경 관리 과정에서 발생한 예측하지 못한 오류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시스템의 복잡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의 부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영국 의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장애 기간 온라인 결제의 56%가 실패했다. 특히 해당 기간 월급날 및 세금 신고 마감일과 겹치면서 일상적인 경제 활동이 마비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 사태로 직접적인 고객 보상액만 최대 750만 파운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해당 건은 단발성 사건이 아니었다.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조사 결과 2023년 1월부터 올해 2월 사이 영국 9개 주요 은행에서 최소 158건의 IT 장애가 발생했다. 총 803시간(약 33일 이상)의 다운타임이 기록됐다. 당시 메그 힐리어 영국 하원 공공회계특별위원회 위원장 "가장 성공적인 은행과 주택금융협회조차 기술적 문제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볼이 60년이 넘도록 업계에선 퇴출당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의 핵심 업무, 대규모의 안전한 거래 처리에 있어서 상당한 효율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당 수만 건의 트랜잭션을 99.999%의 가용성으로 처리하는 능력은 현대의 분산 시스템으로는 쉽게 복제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지난 2022년 관련 독립조사기관 밴슨 본(Vanson Bourne)'에 따르면, 당시 업계가 운영하는 시스템의 코볼 코드 라인은 8000억 줄 이상으로 추정됐다. IBM 자료에 따르면 세계 상위 50대 은행 중 45곳이 코볼 애플리케이션이 주로 실행되는 IBM 메인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문제는 코볼의 성능이 아니다. 수십 년간 땜질식으로 기능이 추가되면서 극도로 복잡해지고 문서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그 내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블랙박스'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기술적 노후화가 아닌 '지식의 붕괴'라는 위협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바클레이즈 사태와 GAO의 경고는 시스템이 '오래되어서'가 아니다. 해당 시스템을 안전하게 수정하고 유지보수하는 데 필요한 암묵적 지식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변경조차 예측 불가능한 대규모 장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IT 시스템을 지탱하는 인력 기반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미국 고용 통계 분석 기관 지피아(Zippia)의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기준 미국 내 코볼 프로그래머의 72%가 40세 이상이다. 이들이 향후 5~10년 다수가 은퇴할 경우 코볼 관련 심각한 지식 공백이 발생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IT 전문 컨설팅 업체인 '멀린스 컨설팅'의 크레이그 멀린스 대표는 "프로그래머가 고령화돼 은퇴할수록 그들이 다루던 코볼도 함께 나이 들면서 구인난이 심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코볼 위기'는 IT 시장에서 이른바 '레거시 현대화' 시장을 창출했다. IT 서비스 산업, 클라우드 산업, 소프트웨어 산업 전반에 걸쳐 막대한 파급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스템 장애의 현실화와 인력난 심화가 결합하면서 기업은 더 이상 IT 시스템 현대화를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업 모더 인텔리전스는 레거시(구식 시스템) 현대화 시장이 올해 249억 8000만달러에서 오는 2030년 568억 7000만 달러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레거시 현대화 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생성형 AI의 도입이다. AI는 현대화 프로젝트의 경제성과 속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 부상했다. 과거 수많은 개발자가 몇 년에 걸쳐 수작업으로 수행해야 했던 코드 분석과 변환 작업을 AI가 몇 달 만에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무기로 레거시 현대화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메인프레임 시장의 강자로 불리는 IBM은 'watsonx Code Assistant for Z'를 앞세워 코볼-자바 코드 변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신형 메인프레임 'IBM z17'을 발표하며 하드웨어 혁신도 지속하고 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에이전트 기반 AI를 활용해 IT 시스템 현대화 전 과정을 자동화하려고 한다. 구글 클라우드는 작년 4월 AI 서비스 '제미나이'를 활용한 'Mainframe Rewrite'를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역시 7월 AI 에이전트를 활용한 코볼 마이그레이션 패턴을 제시하며 추격 중이다. 일각에선 AI 기반 현대화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AI는 코볼 코드를 자바로 자동 변환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환된 코드의 효율화와 유지 보수도 결국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언어를 갈아탔다고 해서 복잡한 데이터 구조와 고속 트랜잭션 처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국 금융업체도 역시 글로벌 코볼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후화된 시스템과 인력난은 국내 금융 시장의 중대한 운영 리스크로 꼽힌다. 동시에 국내 IT 기업에는 사업 기회도 제공한다.
국내 금융권의 IT 리스크는 심각한 수준이다. 강민국 의원실의 금융감독원 자료 분석에 따르면 최근 5년여간(2020년~2025년 5월) 국내 금융권에서 발생한 전산 장애는 총 1763건에 달했다. 누적 장애 시간은 약 48만 시간에 이른다. 가장 큰 원인은 프로그램 오류(41%)였다. 이는 레거시 시스템 관리의 어려움을 방증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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