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논의끝에 "없던 일로"
李 "금융위 업무 정리" 언급에
국정위, 대대적 개편작업 착수
與, 패스트트랙 추진 전 백지화
“4개월 동안 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했습니다. 여당에서 한 차례의 의견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해놓고 이제 와서 백지화하면 그간의 혼란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정부·여당이 25일 ‘금융위원회 해체·금융감독원 분리’를 골자로 한 감독체계 개편안을 원점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금융 관련 정부 조직은 현행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금감원 직원들의 거센 반발을 산 공공기관 지정도 ‘없던 일’이 됐다. 감독체계 개편을 우려한 금융권에선 “개악을 막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각에선 정부·여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감독체계 개편을 한순간에 뒤집어 금융권에 혼선과 상처만 남겼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월 대선 유세 일정 중 “금융위원회에 감독과 정책 업무가 뒤섞여 있어 분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6월 출범한 국정기획위원회는 곧바로 감독체계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국정기획위가 개편안 초안을 마련했고 이달 15일에는 여당 의원 전원 명의로 ‘금융위원회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발의됐다.
개편 핵심은 금융위의 국내 금융정책 부문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회사 감독 업무만 전담하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금감원 산하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분리해 금융소비자보호원이라는 별도 조직을 설립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국민의힘이 제동을 걸면서부터다. 정무위원장인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이 한 차례도 사전 협조를 구하지 않았다”며 금융위 설치법을 상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25일 금융위 설치법을 신속 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할 방침이었다. 패스트트랙으로 진행하면 180일이 지난 내년 4월 이후에야 정무위를 통과할 수 있다.
국회 본회의 당일인 이날 상황이 급변했다. 한정애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브리핑에서 “금융위 정책·감독 기능 분리 및 금소원 신설을 이번 정부 조직 개편에 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내년 6월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해관계자 반대가 극심한 조직 개편을 강행하기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여권 관계자는 “지방선거는 정권 초반 굉장히 중요한 시험대인데 이를 앞두고 조직 개편 이슈를 계속 끌고 가는 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감독체계 개편안이 무산된 건 다행이라면서도 사전에 여야 협의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여당 내에서는 지난 11일 특검법 수정안과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여야 합의가 뒤집어진 후폭풍이 현실화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민주당 의원은 “강성 당원들에게 휩쓸려 합의를 번복한 후과를 당이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했다. 그간 금융권에선 감독체계 개편이 금융산업 경쟁력을 후퇴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금융감독 조직이 여러 개로 쪼개져 있으면 위기 대처 능력이 크게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 때문에 감독체계 개편이 백지화되자 금융권에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이병래 손해보험협회장은 “조직 개편과 관련한 금융시장 혼란이 조속히 수습되고 생산적 금융을 위한 노력이 탄력받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여당은 감독체계 개편 과정에서 불거진 혼란에 대한 책임론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새 정부 초반에 추진해야 할 금융 과제가 많은데 조직 개편 논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