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못 써요"…엘베 내렸더니 계단 나오는 아파트
격층 엘리베이터, 일부 노후 아파트서 운행
"사람보다 비용이 중요했던 시대의 그림자"
"경기침체 깊어지면 반복될 미래" 우려도
황씨는 "업무용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홀수 층, 짝수 층을 나눠 운행하는 경우는 봤어도 아파트에서 홀수 층만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라며 "왜 아파트를 이렇게 지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인 노후 아파트에서도 구경하기 어려운 격층 운행 엘리베이터는 1970년대 오일쇼크의 산물입니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1978년 이란 혁명으로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생산량 감소를 겪으며 배럴당 2.9달러 수준이던 원유 가격은 12달러, 재차 39달러까지 급등했습니다.
가난한 비산유국이던 한국은 이 여파로 1980년 실질성장률 -2.1%와 물가상승률 28.7%를 기록하는 등 국가 경제가 휘청였습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 가격이 10배 넘게 오르고 외환도 부족해지자 당시 사회는 '안전'보다 '절약'을 우선했습니다.
건축 현장에서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구조를 단순화했고 엘리베이터도 비용 절감을 위해 반층짜리가 설치됐습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 외에는 3층과 4층 사이, 5층과 6층 사이와 같이 중간층에만 멈추는 구조입니다.
엘리베이터를 이렇게 설치하면 공사 과정에서는 엘리베이터 탑승구를 줄일 수 있고, 이후에는 모든 층에 운행에 비해 운행 횟수가 줄면서 소모 전력을 25%까지 절감하는 효과가 납니다. 국가적으로는 원유 수입에 들어가는 달러를 아끼는 효과까지 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거주자들의 편의와 안전은 도외시되지만 말입니다.
전국에서 노후 아파트 재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이러한 아파트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소수에 그칩니다. 다만, 전국 각지에 지어졌던 만큼 서울에서도 여의도와 잠원, 이태원 등 일부 지역 노후 아파트에서는 현대 건축법에서 허용되지 않는 옛 방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건축이 아니라면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를 모든 층에 멈추도록 바꾸려면 탑승구부터 새로 뚫어야 합니다. 자칫 아파트 하중을 지탱하는 내력벽에 충격을 줄 우려가 있습니다. 설비 교체와 구조 변경까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도 요구됩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불편이 크긴 하지만, 그 공사를 할 돈이면 재건축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등포구 여의도동 A 아파트 주민은 "청년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지만, 체력이 떨어진 노인들에게 계단은 큰 장벽"이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도 계단을 올라야 하기에 짐이 많거나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곤혹스럽다"고 토로했습니다.
1977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유모차나 휠체어를 사용하기도 불편합니다. 현재 재건축 사업이 진행 중이기에 향후 수년 뒤에는 생활 편의성이 뛰어난 새 아파트로 거듭날 예정이라는 점이 주민들의 위안거리입니다.
격층 엘리베이터를 단순한 불편함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반층짜리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용산구 이태원동 B 아파트의 한 주민은 "요즘같이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며 "우리나라가 성장 동력을 잃으면 다시 사람보다 비용이 중요했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0.9%로 전망했습니다. 1960년 이후 한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이 1.0%에도 못 미쳤던 것은 4차례뿐이었는데 한은과 정부의 예측대로라면 올해가 5번째가 됩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 밑으로 떨어졌다고 보고 있다"며 "미국같이 큰 나라도 2% 넘는 잠재성장률을 갖는데 우리나라가 1%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했습니다.
노후 아파트에 남은 격층 엘리베이터는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의 그림자이지만, 동시에 한국의 경제적 후퇴가 현실이 되면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