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중대재해, 처벌만이 능사 아닌 이유

조미현 기자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국회서 중대재해법 추진 때
여당 내서도 이견 상당

규제·처벌 일색의 정부 대응
금융당국마저 균형 잃어

기업에만 책임 돌린다면
안전과 생명 지킬 수 없어

조미현 금융부 차장
국회를 출입하던 2020년 기억을 되살려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중대재해법 제정에 속전속결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당내 이견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양향자 당시 최고위원은 “기업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중대재해를 막을 수 없다”며 “수준 높은 안전관리업체를 쓰는 등 안전 예방에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삼성전자 임원 출신인 그의 주장은 반기업 정서가 만연한 민주당 내에서 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로만 치부됐다. 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주장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선출된 이후 정책위원회 의장에 오른 한정애 의원도 반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한 의장은 중대재해법 제정을 밀어붙인 이낙연 대표 체제에서도 정책위 의장을 맡았다. 한 의장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한 의장의 정책위는 소상공인 등 다른 경제 주체에 미칠 파급효과를 고려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한 의장이 갑작스럽게 환경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민주당 내 신중론은 힘을 잃었다.


중대재해법 제정에 속도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원안에 ‘공무원 처벌조항’이 포함되면서다. 민주당 내부적으로 이 조항에 우려가 컸다. 사석에서 만난 민주당 정책위 관계자는 “대통령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며 걱정을 드러냈다. 사실 중대재해법이 추진된 건 기업이 아니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하청업체 직원 김용균 씨의 사고가 계기가 됐다.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기관은 한국서부발전이고, 서부발전을 관할하는 부처는 산업통상자원부다. 산업부는 대통령 지휘 아래 있다.

당시 기억이 떠올라 중대재해법을 다시 들춰봤다. 해당 조항은 빠져 있었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 제외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조항이 그대로였다면 최근 코레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는 국토교통부 장관과 대통령 책임으로까지 번졌을 수 있다. 다만 법의 목적을 밝힌 제1조에는 사업주, 경영책임자, 법인과 함께 ‘공무원’도 여전히 처벌 대상에 포함돼 있다.

과거 기억을 더듬어 본 건 중대재해를 두고 정부 대응이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금융당국까지 나서 중대재해를 기업 신용평가나 여신 심사, 공시와 기관투자가의 투자 판단 요소로까지 확장하기로 했다. 기업에 대한 압박 효과는 작지 않겠지만, 실질적인 예방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특히 중소기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제조업에서 일어난 중대재해(146건) 가운데 직원 50인 미만 소기업에서 발생한 사고 건수는 74건(50.7%)에 달했다. 직원 1000인 이상 대기업에서는 16건(11%)에 그쳤다.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이 주요 선진국 대비 높은 건 사실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의 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 수는 0.43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23명을 웃돈다. 하지만 기업 탓만 하기엔 복합적인 요인이 맞물려 있다. 한국은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안전 규범을 내재화할 시간이 부족했다. 더구나 한국 산업 생태계에서는 중소기업이 99% 이상이고 전체 고용의 80%를 담당한다. 중소기업은 안전 관리를 위한 별도의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대기업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역시 하청업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금융·경제 분야에서 산업 현장의 안전 예방을 돕고 싶다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안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나 정책금융을 통한 저리 대출 지원을 강화하는 방식이 나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기업이 안전을 강화하려면 설비 투자와 인력 확충, 교육 등에 상당한 비용 부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이후 안전설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폐지·통합했다. 이제 와서 대출 심사나 기관투자 시 불이익과 같은 규제책을 내놓는 정부가 되려 근본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안전과 생명이 우선이라는 원칙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중대재해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거나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는 순간 진정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 기업을 숨 돌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식의 비난과 처벌만으로는 안전과 생명을 지킬 수 없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