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뺏고 CCTV 감시하며 '감금'
조직 탈퇴하려면 인질이나 돈 요구
"범죄 가담만으로 처벌 가능성 있어 주의"
[파이낸셜뉴스] 한국인을 겨냥한 온라인 기반 사기범죄가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전역에서 둥지를 틀고 있지만 대부분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면서 정부도 피해 규모 집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5일 파이낸셜뉴스가 올해 선고된 ‘동남아 발생한 보이스피싱·로맨스스캠·리딩방 사기 사건’ 1심 판결문 49건(범죄조직 중복 포함)을 분석한 결과, 다수의 범죄조직이 여러 국가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했다.
예컨대 베트남과 필리핀 등에서 활동하는 한 조직이 캄보디아로 입국한 한국인을 베트남 사무실로 보내는 식이다. 반대로 태국 등에서 납치한 한국인들 캄보디아에 사례도 있다.
이로 인해 현지 경찰조차 실태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청에서 파악하지 않는 통계”라며 “관련 신고 접수는 외교부 소관”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소관 국인 영사안전국에서 관련 사례를 집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판결문에는 범죄조직들의 활동도 상세하게 기재됐다. 이들은 대부분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며 '고수익 일자리'로 속여 조직원을 모집했다. 여자친구, 동네 선배 등 가까운 지인에게 제안을 받고 해외로 향한 사람도 있었다.
범죄조직은 조직원들이 입국하면 여권을 뺏은 뒤 외출을 제한하고, 폐쇄회로(CC)TV로 감시하는 등 '감금'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향후 조직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원들이 서로를 가명으로 부르게 하는 등 치밀함도 같았다.
조직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인질이나 돈을 조건으로 거는 사례 역시 유사하다. 한 조직은 조직원이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친구 한 명을 불러 인질로 남기거나 1만달러(약 1400만원)를 내야 한다고 협박했다. 사무실 입구에는 현지인 경비원 5~6명, 사무실 각층에는 총을 든 경비원 2~3명이 상주하고 있어 조직원들의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표현됐다.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이라고 겁을 주며 조직원들의 이탈을 막기도 했다. 한 조직은 탈퇴 의사를 밝힌 조직원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경찰에 보이스피싱을 했다고 신고하겠다, 인터폴에 신고하겠다, 이 일에 가담한 것만으로 징역 안 갈 것 같냐" 등이라고 위협했다. 사전에 조직원들이 보이스피싱 콜센터 업무를 하는 영상을 촬영하거나, 인적사항과 함께 '나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입해 보이스피싱 범행을 했다'라고 말하는 영상을 촬영한 뒤, 이를 협박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만들어 보다 치밀하게 관리하며 조직원들의 활동을 통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동강령에는 △옆 사람과 대화하지 말 것 △조직원들끼리 본명을 알려주지 말 것 △실적이 저조하면 밤 11시까지 야근 △지각 시 급여 차감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쉬는 날 없이 온종일 근무하게 하는 '노동착취'도 적지 않았다. 한 조직은 월~금요일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토·일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근무하도록 했다.
법조계에선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의심스러운 일자리 제안은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몰랐더라도 범죄 발생 가능성을 인지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면 유죄 판단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임동한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불법적인 행위를 통한 고수익 일자리임을 알고 출국했고, 이로 인해 보이스피싱 등 범죄 피해가 발생했다면 송환 이후 처벌될 수 있다"며 "감금·고문 등이 있었다면 정상참작될 여지는 있지만, 의사가 아예 박탈된 상태에서 범죄가 이뤄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준범 법률사무소 번화 변호사는 "형법상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자기 또는 친족의 생명 신체에 대한 위해를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 처벌되지 않을 수 있다"며 "그러나 '미필적 고의'라도 있었다면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