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視角] 비용 없는 안전은 없다

안승현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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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현 전국부장
지난달 26일 대전의 한 데이터센터에서 불이 났다. 무정전전원장치 배터리를 옮기다 불꽃이 튀었고, 그 작은 불씨 하나가 정부24를 비롯한 647개 행정 서비스를 멈춰 세웠다. 공익직불금 지급이 중단됐고, 모바일 신분증이 먹통이 됐으며, 화장장 예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고 시작부터 지금까지 백업이 대체 왜 없었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친구 만나러 나갈 때 입는 옷이 따로 있고 특별한 날 걸치는 옷이 따로 있지만, 국가 전산망의 옷장에는 달랑 한 벌뿐이었다.

지난 2022년 카카오가 멈췄을 때 우리는 들끓었다. 정부는 민간기업에 이중화 시스템을 의무화했다. 그때 카카오에 호통치던 높으신 분들이 정작 국가 전산망은 어떻게 대했는지가 충격적이다.

대전이 멈추면 전국이 멈추는, 말 그대로 '한 방'에 끝나는 구조였다. 게다가 불이 난 배터리는 보증기한이 1년이나 지난 노후 장비였다. 배터리 사이 이격 간격은 기준보다 30㎝나 좁았다.

'화재 시 3시간 내 복구'를 강조하던 호언장담은 허황된 구호였음이 드러났다. 추석을 앞둔 재래시장 과일가게 사장님도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떨이를 외치지만 사실은 예비 귤 상자 몇 개는 준비해 둔다. 그런데 IT 강국의 국가 전산망은 예비가 없었다.

정부는 요즘 '인공지능(AI) 기반 정부 혁신'을 외친다. 세계 1위 AI 정부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어 보고 나니 결국 모래성 쌓기가 되지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안전과 보안이 전제되지 않은 AI는 허상일 뿐이다. 배터리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정부가 어떻게 AI로 국민을 섬긴다는 건가.

일본은 지진이 잦은 나라답게 데이터를 부처별, 지자체별로 분산한다. 한곳이 무너져도 다른 곳이 살아 있다. 우리는 효율을 추구하다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았다.

그 바구니가 떨어지는 순간 133만 농가에 지급될 2조5000억원의 공익직불금 처리가 멈췄다. 농민들은 수기 접수라는 원시적 방법으로 돌아가야 했다.

민간엔 이것저것 강제하면서 정작 국가 전산망 이중화를 위한 공주센터는 예산 부족으로 제 기능을 못한다. AI 정부와 디지털 혁신을 외치지만 정작 안전에 투자할 돈은 늘 쪼들리게 배정한다. 슬로건은 풍족하되 예산에는 가뭄이 끊이지 않는 괴상한 구조는 10여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전신인 '정부통합전산센터'는 본래 IT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2005년 출범 당시 정보통신부가 소관 부처였다. 그러나 정통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전문성이 없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행정자치부(지금의 행안부)로 소속이 옮겨졌다.

결국 관리 주체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보니 노후 장비를 때에 맞게 교체하지 않았고, 국가 전산망 유지보수 예산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중앙 집중은 빠르고 편하다. 그러나 한곳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분산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든다. 하지만 한곳이 무너져도 다른 곳이 버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빠듯한 살림에서는 당장 급하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재난은 그 '쓸데없는 것'이 없을 때 찾아온다.

안전에는 비용이 든다. 그건 낭비가 아니라 투자다. 만원도 안 되는 돈을 들여 소독약과 거즈로 병을 고칠 수 있다면 그게 낫다. 하지만 그건 가벼운 상처일 때 얘기다.

국가 전산망은 가벼운 상처가 아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대전의 배터리 하나가 IT 강국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민간을 향한 호통이나 근거 없는 호언장담으로 넘기기에는 국민들이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럴싸한 슬로건은 그만하고 뭐가 됐든 진짜 정책을 내놔야 할 때다.

ahnma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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