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부터 민주화운동 투신
DJ 투옥되자 침묵시위 기획
1997년 정권교체 주역으로
김대중평화센터 이끌면서
부친 유산 지키는 데 매진
조국 "DJ 떠올라 가슴 아파"
국힘 "민주주의 헌신 존경"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김 이사장은 평소 신장이 좋지 않았는데, 최근 합병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며 부고를 전했다.
김 이사장은 단순히 '대통령의 아들'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형인 고 김홍일 전 의원과 함께 아버지와 고난을 함께한 동지였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 교체를 이끈 선거 전략가였다.
1950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0년대 상경해 경희대를 졸업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의 감시로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부친을 도와 민주화운동을 했다.
특히 아버지의 정치 역정은 고인의 삶에 그대로 투영됐다. 스물 여섯이던 1976년 김 전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자 김 이사장은 재야 인사들과 함께 구명운동을 펼쳤다. 당시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관련자 부인들이 입에 검은 십자 테이프를 붙이고 벌인 '침묵 시위'는 그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아예 시위 배후 조종 혐의로 지명수배돼 3개월간의 도피 생활 끝에 체포돼 70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미국 망명 시절 김 전 대통령과 동행해 현지에서 미주인권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리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케네디 등 미 정계 유력 인사들과 직접 교류해 이를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고문 사건을 폭로한 인재근 전 의원의 녹음 테이프를 뉴욕타임스에 제보해 세계적 공분과 연대를 이끌어낸 것도 그의 공적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귀국 후엔 아버지의 정치 활동을 돕기 위해 정치 홍보·기획사 '평화기획'을 설립해 운영했다. 1995년 대선을 앞두고 설립한 '밝은세상'을 통해 1997년 대선에서 과학적 여론조사 분석과 홍보 캠페인을 펼치며 김 전 대통령의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DJ DOC의 노래를 개사한 'DJ와 함께 춤을' 선거 광고는 큰 화제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밝은세상'이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고인은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부친의 유산을 지키는 일에 매진했다. '재단법인 김대중기념사업회'(현 김대중재단)를 설립하고, 2019년 이 여사가 별세한 뒤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았다.
유족은 부인 신선련 씨와 아들 종대·종민 씨 등으로,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김대중평화센터와 김대중재단이 주관한다.
빈소는 이날 오후 3시 30분께 마련됐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근조기와 근조화환이 속속 설치됐다. 이날 장례식장을 방문한 첫 손님은 인요한 국민의힘 의원이었다. 인 의원은 매일경제에 "김 전 대통령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정치인"이라며 "김 전 대통령과 가족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아드님의 희생도 간직하고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4시 45분께 장례식장을 찾은 조국 조국혁신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고인과 깊은 인연은 없지만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다"며 "돌아가신 김 전 대통령, 김 이사장 모두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기에 여러 생각이 들고, 몸이 안 좋게 떠나시게 돼 가슴이 아프면서 김 전 대통령 생각도 난다"고 말했다.
김봉일 김대중재단 위원장은 "형과 동생이 고문을 당하면서 몸이 많이 상했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돼 더 이상 내란 사태가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형민 기자 / 지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