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털면 털리는 ‘죄’…미국에는 없는 배임죄가 한국기업에 미친 영향 [매경데스크]

손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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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5.08.04. 오전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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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열린 비상경제점검 태스크포스(TF) 3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배임죄의 제도개선 대책을 지시했다.
경영은 위험동반이 숙명인데
모호한 정의, 고무줄 잣대로
기업인 ‘배임’ 공포에 짓눌려
기업가정신 마음껏 뛸수있게
배임죄의 그림자서 벗어나야
“누구든 털면 다 털린다.” 특수수사를 해본 검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이들이 유독 아끼는 형법 조항이 하나 있다. 형법 제355조 2항, 바로 ‘배임죄’다.

검사 시절 특별수사를 많이 담당했던 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전 원장은 “배임죄는 삼라만상을 다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특수부가 즐겨하는 먼지털기식 수사에서 배임죄라는 잣대를 피해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배임죄가 ‘실체’보다 ‘해석’에 따라 제멋대로 휘어지는 고무줄이라는 데 있다.

형법 제355조 제2항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를 배임죄로 규정한다. 문장을 곱씹어보자. ‘타인의 사무’, ‘임무에 위배’, ‘손해를 가한 때’ 등 모든 문구가 흐릿하다. 무엇이 임무고, 손해는 어떻게 계산하나. 법조문은 짧지만 수사기관의 상상력은 길다.

예컨대 기업 CEO가 장기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단기 손실을 입었다면 이는 경영상 판단인가, 아니면 배임인가. 검사의 해석에 따라 경영자의 모험이 하루아침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임죄 때문에 기업인들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처지라는 한탄이 나오는 배경이다.

사정당국은 이 모호성을 무기로 삼는다. 배임죄가 수사기관의 선택에 따라 ‘마법의 카드’처럼 활용되는 순간, 기업인들에 배임‘이란 두 글자는 공포가 된다. 결국 기업은 적극적인 투자보다 리스크 회피에 나선다. 혁신을 위한 도전, 창의적 경영이 설 자리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결국 손해를 보는 건 기업, 주주,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비상경제점검TF 회의에서“배임죄가 남용되면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는 만큼 제도적 개선을 모색해야 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말만이 아니다.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은 배임죄에 대한 개선작업에 착수했다. 핵심은 배임죄 폐지 또는 대폭 축소다.

폐지를 검토하려면 먼저 탄생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순리다. 한국 형법의 배임죄는 독일과 일본 배임죄에서 유래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에 따라기업의 이익을 위해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해준다. 일본은 고의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배임죄가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한 것이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배임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인의 재산범죄는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횡령·사기죄로 처벌한다. 이 대통령이 배임죄에 대해 “형사 제재까지 가하는 것이 국제적 표준에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대한민국 배임죄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경제 활력을 꺾는 족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사법 신뢰 회복과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될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그 방향을 결정해야 할 때다. 형벌이 아니라 규율, 낙인이 아니라 회복을 추구하는 형사법 체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배임’이라는 두 글자 앞에 멈칫하는 기업인이 있을 것이다. 실패할 자유 없는 사회에서 누가 도전하겠는가. 배임죄의 뒤안길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손일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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