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배임죄의 뒤안길

손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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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은 위험동반이 숙명인데
모호한 정의, 고무줄 잣대로
기업인 '배임' 공포에 짓눌려기업가정신 마음껏 뛸수있게
배임죄의 그림자서 벗어나야




"누구든 털면 다 털린다."

특수수사를 해본 검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이들이 유독 아끼는 형법 조항이 하나 있다. 형법 제355조 2항, 바로 '배임죄'다.

검사 시절 특별수사를 많이 담당했던 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의 이야기 속에 그 힌트가 있다. 이 전 원장은 "배임죄는 삼라만상을 다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수사기관의 상상력에 따라 누구든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배임죄가 '실체'보다 '해석'에 따라 제멋대로 휘어지는 고무줄이라는 데 있다.

형법 제355조 제2항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를 배임죄로 규정한다. 문장을 곱씹어보자. '타인의 사무' '임무에 위배' '손해를 가한 때' 등 모든 문구가 흐릿하다. 무엇이 임무고, 손해는 어떻게 계산하나.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장기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단기 손실을 입었다면 이는 경영상 판단인가, 아니면 배임인가.

사정당국은 이 모호성을 무기로 삼는다. 배임죄가 수사기관의 선택에 따라 '마법의 카드'처럼 활용되는 순간, 기업인에게 '배임'이란 두 글자는 공포가 된다. 결국 기업은 적극적인 투자보다 리스크 회피를 선택한다. 혁신을 위한 도전, 창의적 경영이 설 자리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결국 손해를 보는 건 기업, 주주,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 대통령은 "배임죄가 남용되면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는 만큼 제도적 개선을 모색해야 될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말만이 아니다.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은 배임죄에 대한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핵심은 배임죄 폐지 또는 대폭 축소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부정한 기업인은 엄하게 처벌해야 하지 않느냐." 맞다. 그러나 그건 배임죄 대신 다른 조항, 횡령이나 뇌물로 다룰 수 있다.

사실 한국만큼 배임죄가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나라가 드물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배임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형법 배임죄의 모델인 독일과 일본에서도 엄격하게 배임죄의 요건을 제한한다.

독일은 경영상 판단을 원칙적으로 면책한다. 일본은 고의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우리만 '고무줄 잣대'인 배임죄로 모든 걸 재단해왔다.

이 대통령도 이야기했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고. 글로벌 비즈니스의 바다를 항해하고 리스크라는 산맥을 정복해가는 사람들이 기업인이다. 이들의 도전과 모험이 더 진취적이고 활발하게 이뤄질 때 국가경쟁력도 올라간다.

그런 기업인의 발목을 옥죄는 배임죄라는 사슬은 이제 풀어줘야 할 때다.

더욱이 기술 발전은 빛의 속도로 이뤄지고, 경쟁의 무대는 국경을 넘나든다. 그런 시대에 경영자의 판단을 정형화된 법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랐다.

대한민국 배임죄는 이제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경제활력을 꺾는 족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업들의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될 것인가.

시간이 넉넉지 않다. 형벌이 아니라 규율, 낙인이 아니라 회복을 추구하는 형사법 체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배임'이라는 두 글자 앞에 멈칫하는 기업인이 있을 것이다. 배임죄의 공포가 어른거리는 사회에서 기업가정신이 싹틀 공간은 없다. 배임죄의 뒤안길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손일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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