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완의 논점] 구청장의 출근길

박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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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3.06.16. 오후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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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에 한 번은 이태원을 찾는다. 지난해 10월 29일 오후 11시 55분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통제 중'이라는 당시에는 다소 아리송했던 재난문자를 받은 동료 기자들과 함께다.

이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은 2월, 이태원 메인스트리트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가게마다 힙한 '요즘 노래'를 틀어뒀지만 가게 안과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첫 장면 같은 풍경이었다. 동료 중 한명은 "희생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무서워서 도저히 여기서 먹을 수는 없겠다"고 했다. 그날 그곳에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

이태원을 다시 찾은 4월,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리엔 사람이 북적였고 몇몇 유명한 가게에는 대기 줄이 생겼다. 메인스트리트가 보이는 루프톱에서 "다음 모임 때는 여기 루프톱에 사람 많아서 못 오겠다" "이태원이 회복되는 것 같으니 이제는 슬픔만을 얘기하기보다는 참사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대화를 나눴다.

슬픔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으리라는 감상이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석으로 풀려난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지난주인 8일 오전 구청으로 출근하겠다고 밝혔다. 제대로 된 사과와 유가족과의 대화를 기대하고 용산구청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굳게 잠긴 구청장실 문과 이미 오전 7시께 출근했다는 구청 직원들의 말, 그 앞에서 흐느끼는 유가족의 모습뿐 이전과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유가족들이 힘으로 뜯어낸 구청장실 문 뒤에서 또 하나의 굳게 닫힌 문과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방화문을 발견하고는 진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박 구청장은 '몰래 출근' 하루 만인 9일에는 연차를 냈고 12일에는 병가를 내고 두문불출했다. 14일에는 '원활한 공무 수행을 위해' 용산경찰서에 청사시설물 보호 요청 공문을 발송하고 기동대 투입을 요청했다. 그가 내놓은 사과는 본인 명의가 아니라 용산구 명의로 낸 보도자료가 전부다.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유가족과는 협의하여 만나겠다"는 문장에는 주어가 없었다.

박 구청장과 이임재 전 용산경찰청장의 구속,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가 있었지만 아직 유가족과 시민이 정부에 보낸 이태원 청구서는 제대로 된 답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책임을 떠안은 이들 3명 중 누구 하나도 유가족을 만나 사죄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중 구속 혹은 탄핵 상태에서 벗어나 업무로 돌아오는 첫 사례인 박 구청장의 입에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박 구청장의 출근길에 정답은 있었다. 안전조치 등을 사전 조율해 구청 앞에 정시에 출근하고, 고개 숙여 사과하고, 유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미리 준비한 재발 방지책을 발표하고 이행을 약속하는 것. 4개월여 뒤면 다시 돌아올 10월 29일과 핼러윈 근처에는 이태원에서 추모행사를 열고, 슬픔을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않도록 예년과 같이 축제도 여는 것. 위로 쪽지가 가득한 해밀턴호텔 옆 가벽을 활용해 추모공간을 만드는 것.

다시 10·29가 돌아오기까지 남은 날짜는 137일이다. 첫발을 잘못 뗐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동료 기자들과 다음번에 이태원을 찾을 때에는 참사를 잊지 않으면서도 이태원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길 바란다.

[박제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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