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0월 23일(이하 현지시간).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잭 케보키언 박사가 여성 두 명의 자살을 도와 논란이 일었다.
이날 오후 7시7분. 케보키언 박사는 보안관 사무실에 직접 전화를 걸어 여성 두 명이 미국 미시간주 오리온 호수 인근의 한 오두막에서 사망했다고 신고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케보키언은 직접 진입로 문을 열어주며 이들을 맞이했다.
사망한 여성은 12년간 다발성 경화증을 앓은 셰리 밀러(당시 43세)와 만성 골반통을 호소했던 마조리 완츠(당시 58세)였다. 두 사람은 케보키안과 수년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여성은 가족들과 함께 사망 전날 케보키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다음날 케보키안이 발명한 이른바 '자살 기계'를 이용해 죽음을 택했다. 이 기계는 마취 주사와 치명적인 약물 및 가스 등을 투여하는 장치였다.
완츠는 "3년 반 동안 디트로이트에 있는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이건 삶이라 할 수 없다"며 자신의 투병 인생 을 "완전한 지옥"이라고 묘사했다.
휠체어 생활을 했던 밀러는 사실상 집에 갇혀 살고 있었고, 기회가 된다면 케보키안의 '자살 기계'를 사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완츠는 오후 5시5분 생을 마감했고, 밀러가 약 1시간 후인 오후 6시16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마지막 순간, 장치를 직접 조작했다. 현장에는 케보키언과 완츠의 남편 윌리엄, 밀러의 친구인 셰릴 웰치가 있었다. 웰치는 밀러가 "사랑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죽을 권리' 주장한 케보키언…자살 조력 후 4차례 풀려나 케보키언은 1980년대 중반부터 "환자들이 편안히 숨을 거두게 하는 것도 의사의 의무"라며 '죽을 권리'를 주장해 화제를 모은 인물이었고, 누군가의 자살을 도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케보키언은 1990년 6월 알츠하이머 환자였던 재닛 앳킨스(당시 54세)의 자살을 도운 바 있었다. 케보키언의 첫 자살 조력이었다. 알츠하이머 말기가 되기 전에 삶을 중단하길 원했던 앳킨스는 케보키언의 조력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오클랜드 카운티 당국은 앳킨스 사건으로 케보키안을 1급 살인 혐의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미시간주에는 자살 조력을 구체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이 없다"며 사건을 기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츠와 밀러의 자살을 도운 케보키언은 다시 한번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케보키언 박사의 변호사 제프리 피거는 "케보키언은 두 여성의 사망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완츠와 밀러의 사망은 두 사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케보키언 박사는 현장에 있었고, 전문 지식을 제공했을 뿐"이라며 "두 사람 모두 자기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했다"고 했다.
9년간 130명 자살 조력…안락사 과정 공개에 미국 '들썩'
케보키언은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약 9년간 약 130명의 안락사를 도왔다. 이 때문에 '죽음의 의사'(Dr. Death)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가 도운 이들 일부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환자였고, 대부분 장애가 있거나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케보키언은 3가지 약물을 순서대로 주입하는 방식의 '타나트론'(Thanatron·그리스어로 죽음의 기계), 일산화탄소를 마스크에 주입하는 방식의 '머시트론'(Mercitron·자비 기계)등 자신이 고안한 자살 보조 장치로 환자들의 자살을 도왔다. 환자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케보키언은 1998년 9월엔 루게릭병 말기 환자였던 토마스 유크(당시 52세)의 안락사 과정을 녹화해 미국 CBS 시사 프로그램 '60분'(60 Minites)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안락사의 상세한 과정과 환자가 숨이 멎는 장면이 방영되자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안락사에 관한 논쟁이 이어졌다.
'자살 조력' 4차례 풀려났지만…결국 징역형
앞서 케보키언은 자살 조력으로 2급 살인 혐의를 받아 네 차례나 법정에 선 바 있었다. 그러나 시한부 환자가 고통에 울부짖는 영상이 공개되고, 유족이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증언하면서 매번 무죄 또는 미결정 심리 판결로 풀려났다.
그러나 유크의 경우 달랐다. 직접 주사할 힘이 없었던 유크의 팔 정맥에 케보키언이 약물을 직접 주사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공개됐고, 이에 미시간주 검찰은 케보키언을' 2급 살인'(계획되지 않은 고의적 살인)이 아닌 '1급 살인'(사전에 계획된 고의적 살인)으로 기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9년 배심원은 이를 의도적 살인 행위로 보기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케보키언에게 2급 살인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케보키언이 유크에게 불법 약물을 투여한 혐의를 인정해 3∼7년의 징역형을 추가 선고했다.
당시 판사는 "이 재판은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옳으냐 여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법체계 위에 서 있는 사회를 무시한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라며 징역 10~25년 형을 선고했다. 케보키언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행위이니 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소용없었다.
징역 10~25년 형을 선고받은 케보키언은 8년 6개월간 복역하다가 2007년 6월 건강 이상으로 가석방됐다.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더는 안락사를 돕지 않고 안락사와 관련된 자문이나 상담도 하지 않는다' 등의 조건이 붙었다.
석방 4년 뒤인 2011년 6월 케보키언은 미국 미시간주의 한 병원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