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엔 서대문50플러스센터의 실내외 식물들을 관리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엔 동네 ‘작은도서관’ 청운효자동 북까페에서 사서 보조 활동을 하고, 화-목-토요일은 주로 집에서 엄마를 돌보면서 살림하고, 일요일엔 간간이 친구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나가고 그래요.”
오랜만에 마주 앉은 심채선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나는 연극을 전공하지도 않고, 별도로 연극의 이론이나 역사 등을 공부한 적도 없이 무턱대고 만들면서 배웠다. 그리고 그걸 덜컥 일로 삼았다. 그러다가 공공기관에 들어가면서 연극, 혹은 당시의 연극‘계’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읽고 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연극 공연 너댓 편을 보면 꼭 한 번 이상 ‘무대디자인 심채선’이라는 이름을 만났다.
평론가, 연출가, 작가 등이 대부분이었던(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엔 기획자, 프로듀서 등도 이런 ‘공적인 장’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연극전문지 〈월간 한국연극〉의 편집위원에도 그 이름이 있었다.
독립기획자로서 지금껏 공연을 만들면서도 ‘디자인된 무대’를 활용한 적이 거의 없어서 알거나 협업한 ‘무대디자이너’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무대디자이너’와 ‘심채선’은 일종의 동의어 같은 울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꽉 찬 일주일에 ‘무대’ ‘연극’의 자리가 없다.
“언젠가 40년지기가 저에게 ‘너는 나에게 친구라기보다 심채선이라는 고유명사’라고 말해서 충격 받았어요. 심지어 40년지기에게 고유명사로 인식되는 나란 존재는 일반적인 타인들에게 얼마나 이해받기 힘들까… 그러다가 쉰 즈음 엄마 돌봄이 시작되면서, 마침내 저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가 된 것 같아요. 일상을 사는 사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머문 정거장, 연극
“1985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을 마치고 자퇴를 했어요. 학교 밖 청소년이 된 거죠. 10대 후반 몇 년간은 사간동 프랑스문화원과 정독도서관을 아지트 삼아 책과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었죠. 그러다가 외할머니의 ‘부드러운’ 권유로 고졸 검정고시를 보고, 1989년에 심리학과에도 입학했죠. 대입 단과학원에 다니면서 잠깐씩 책상에 엎드려 잘 때마다 꿈을 꿨거든요. 10분 잤을 뿐인데 꿈속에서 경험한 엄청나게 긴 시간의 차이는 뭐지? 심리학과에 가서 ‘꿈의 기제’를 분석해야겠다! 하지만, 실제 접한 심리학과 수업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고, 자퇴와 재입학을 반복하다가 결국 졸업은 2000년에 했어요.
자퇴 후에 교정 알바를 하면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탐색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재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의 ‘한국공연예술아카데미(연기-연출-극작평론-무대로 구성)’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합격! 영화와 광고, 그중에서도 이벤트 기획에 빠져 있을 때라 아카데미의 연출-무대 공부가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기본 커리큘럼이 연극이라 1년 과정 동안 조용히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정말 많은 자극과 감동을 받았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 오픈 전이었던 시절에 연극의 대안학교 역할을 한 그곳에서 학부 전공이 다 다른 1960년대생 언니, 오빠, 또래들이 연극에 대해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였거든요. 게다가 캠퍼스는 덕수궁이었어요. 궁이 문을 닫는 월요일이면 덕수궁을 우리가 접수했죠. 연기 수업만 빼고 극작평론, 연출, 무대미술(무대/조명/의상/분장) 수업을 다 들었어요. 그리고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모두 함께 대학로에 몰려가서 공연보고 술 마시며 토론하고... 점심시간이면 가끔 혼자 서 덕수궁 옆 영국문화원에 가서 데이빗 린치와 피터 그린어웨이의 영화를 보고. 나를 찾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한국 연극사에 등장할 법한 분들을 선생님으로 모시며, 덕수궁에서 생각지도 못한 ‘연극’을 배우다가, 그곳에서 닮고 싶은 두 분의 무대미술가 스승을 만났다. 그분들에게 배움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공연예술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바로 무대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공연예술아카데미 시절의 선생님 일부는 한예종 연극원으로, 무대반의 동기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던 그 시절, 심채선은 벽제에 위치한 무대미술아카데미에서 무대와 조명디자인을 배운다. 그리고 졸업 후 대학로 바탕골예술관의 소극장 조명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무용 작품의 무대디자인을 통해 ‘무대디자이너’로 입봉했다. 스물다섯이었다.
“무대미술은 제가 좋아하던 책, 음악, 영화, 건축 등을 다 섭렵해야 하는 분야라서 기꺼이 ‘나의 일’로 선택할 수 있었어요. 20대 중반이면 아직 더 배워야 하는 나이지만, 일단 ‘나의 일’로 선택하고부터는 프로페셔널한 디자이너로서 책임을 갖고 일을 대했어요.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기 위해 정말 많은 작업을 했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제가 작품에 기여한 시간과 노력을 디자인비로 당당하게 요구하면서.”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연출자’ 리스트!
거의 한 달에 한 편 정도의 작업을 올리면서, 저녁이면 늘 공연을 봤다. 당시 무대디자이너를 지망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학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심채선은 “유학도 가지 않고 20년 넘게 현장에 있었”다.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의 공연이나, 앞으로 같이 작업하고 싶은 안무가나 연출가 등을 탐색하는 기분으로” 밤이면 밤마다 무대디자이너로, 혹은 관객으로 극장에 있었다
초반에는 무대 세트를 필요로 하는 규모가 있는 무용 작품 위주로 작업을 하다가, 연극으로 중심이 옮겨갔다. 일 년에 작업하는 열 편 중 한 편 정도라도 마음에 흡족하면, 다음 작업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고.
장르보다는 작업의 내용과 협업 아티스트를 기준으로 작업을 선택했다. 다양한 작업과 수많은 공연 관람을 통해 ‘절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연출자’ 리스트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졌다.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나 함께 완성한 무대 디자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이 우선 제외 명단에 올랐다.
그 연출자들의 이름을 듣는데, 이제 공연계 짬밥이 20년을 넘어가다 보니 단박에 납득이 된다. 협업하는 디자이너나 스태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결국 본인, 즉 연출이 공연의 ‘제왕’, 다시 말해 무엇을 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인식 때문이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다음 정거장으로…‘하기 싫어서 안 했던 일들도 해보자’
“2008년 즈음, 서울무용제 공연을 마친 후 내 인생에서 중요한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고, 비슷한 시기에 참여했던 소극장 공연 철수 과정에서 어이없는 화재가 나면서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학 준비를 하다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대학원 연극과에 원서를 내고 학기 중에는 공부만 하고, 방학 때만 작업을 하면서 한동안 극장과 거리를 두었죠.”
그렇게 마흔을 맞으면서 그때까지의 ‘하고 싶은 일만 하자’에서 ‘하기 싫어서 안 했던 일들도 해보자’로 마음을 바꿔먹는다. 연극전문지의 편집위원, 공연 리뷰어, 대학 강사, 뮤지컬 작업 등으로 좀더 넓은 현장에서 맡겨진 일을 기꺼이 수행했다. 그리고, 단골로 작업하던 작업자들이 하나둘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심채선의 협업자는 더 젊은 창작자들로 바뀌어갔다.
삶이 현재의 모습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2019년 12월. 엄마가 고관절 부상을 당하면서부터다. 외할머니와 엄마로부터 이어지는 모계 가정에서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독려하는 집안 분위기였던 탓에, 엄마를 돌보기 시작하면서야 처음으로 계란 삶는 법을 책을 보고 배웠을 정도다. 이전에도 틈만 나면 인문학, 영화 등의 시민 대상 강의를 들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지만, 이 즈음부터는 돌봄 강의를 찾아들었고, 요양보호사 강의를 듣고 자격증을 땄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우연히 서대문50플러스센터에서 수강한 식물 강의. 10회차 강의가 끝날 무렵 센터의 식물들을 돌봐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걸 더 잘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식물 관련 강의를 찾아듣다가, 결국 2023년에는 방송통신대학교 농학부에 편입까지 했다. 공연작업을 위해 대학로를 오가다가 방통대 외벽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본 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나이 들어가는 프리랜서 예술인의 고민
‘예술의 각성과 위안’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요즘…
한없이 자유롭고 하고 싶은 작업들을 마음껏 펼치는 곳이 공연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경제적 효율과는 극단에 있는 일인 탓에 공적 지원에 기대지 않으면 작업을 이어가기 어렵고, 공적 지원금이라는 작은 파이를 놓고 20대 초중반의 예술대학 졸업자부터 60~70대 원로 예술인까지가 사실상 무한경쟁을 벌인다.
이 경쟁에서 운 좋게 승리한다 해도 1년 단위(사실상은 10개월 남짓)로 새로운 사고와 질문을 가지고 무대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스템, (예술대학 교수가 되지 않는/못하는) 나이 들어가는 프리랜서 예술인에게 갈수록 좁아지는 입지 등으로 인해, 하고 싶은 마음이나 의지, 축적된 경험과 넓어진 시야와는 상관없이 작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판을 벌리는 기획자로서의 피로감, 좌절과는 또 다르게 기획자나 극장, 혹은 연출에게 제안을 받아 작업을 이어가는 무대디자이너에게는 위와 같은 예술생태계의 순환이 더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까.
“레퍼런스 과잉의 시대잖아요. 특정 시점 이후에 연극들이 하는 얘기들이 비슷하고 지나치게 경쟁하는 게 느껴졌어요. 거기에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공연과 거리가 생겼죠. 어렸을 때는 막연히 극장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올린 작품의 첫공을 보고 만족스럽게 눈을 감는다…. 아니, 근데 그게 공연팀에게 웬 민폐예요!
무대 작업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싶지는 않지만, 욕망이 들끓지는 않아요. 이거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없고요. 최근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 연출들에게 엄청 화를 많이 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돌봄에 지쳐 화풀이를 한 것 같아요. 내 상태가 좋지 않으면 연출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러느니 사람 말고 식물을 상대하기로 한 거예요, 하하!”
지금의 심채선과 ‘연극, 혹은 예술’과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30년 가까이 예술계에 있다 보니, 50플러스센터 같은 곳에서 만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신 분들과 어울리는 게 초반엔 힘들었어요. 지금은 그분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제가 대견해요. 예술계에서 접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인생이 확장되는 느낌이 있어요.
다양한 책과 영화를 읽고 보다 보면 항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진하는 질문들이 제 안에 있어요. 최근에는 폴란드의 예지 하스 감독의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보고 ‘예술의 각성과 위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어떤 공연이 올라가고 있는지보다, 지금 내 호기심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가 더 중요해요. 지금의 나를 일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식물과 도서관이죠. 애초에 계획하면서 목표를 이뤄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흐르는 강물 같아요.”
30년간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나무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는 나의 동네 이웃이다. 심채선이 30년간 살아오고 있는 동네에 내가 10년 전에 굴러들어왔다. 이사하던 날, 그 대단한 재능을 낭비하며 스무 평도 안 되는 집의 도면을 쳐준 언니, 단독주택 생활이 처음이라 초반에 이런저런 문제에 봉착했을 때마다 나의 ‘홍반장 언니’이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의 삶이 안착되면서, 공연에서 미술적 요소로 고민이 있을 때 상의하는 일 말고는 점점 오래 대화할 기회가 사라졌지만, 곧잘 우리는 마을버스 정거장이나 동네 어귀에서 마주쳤다.
그때마다 “무슨무슨 강의 듣고 오는 길”, “요새 농업 공부를 시작했어”, “그 영화 봤어?” “마을센터 2층에 도서관이 있어.” 등의 대화를 통해 항상 그 촘촘한 레이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금은 눈치를 챘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심채선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내심 ‘나이 든 (프리랜서, 무소속) 연극인 되기’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이 딱 좋아요. 10대 후반에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순간부터 늘 스스로 의사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한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나름 꽉 짜인 스케줄 때문에 지루할 틈도 없고, 하루하루 감사하며 지내요. 11월에는 공연 준비도 하면서, 식물 관련된 일자리를 더 찾아보고 싶어요. 도서관이나 미술관 등의 식물을 보살피는 일을 정기적으로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책을 큐레이팅해서 소개하는 일도 해보고 싶고. 그리고 엄마를 좀 더 다정하게 돌보고, 언니에게도 다정한 동생이 되고 싶고.”
종일 비가 내리던 날, 간만에 동네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칼국수도 먹고 그가 동네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딱 닮고 싶은 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한,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하지만 에너지의 결이 조금은 달라진 ‘언니’와 함께하다 보니, 몇 시간만에 훌쩍 만 보를 넘겼다.
[필자 소개] 고주영.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