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 보게 된 화재, 선택지가 없는 이주노동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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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기] 2015년, 이주노동자의 죽음과 한국인식당 비극 (하)
2015년 3월 26일, 뉴욕 다운타운에서 발생한 건물 폭발 사고를 속보로 전한 〈뉴욕포스트〉 기사 온라인 화면 캡쳐. https://nypost.com/2015/03/26/nyc-building-collapse 화재가 난 장소는 얼마 전까지 내가 일하던 곳, 일주일 전에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일하다 쓰러져 사망한 바로 그 식당이었다.    


나의 미국 정착기 첫 장에 쓰여지고만 네팔 선배 직원의 갑작스러운 죽음. (관련 기사: “뉴욕을 놀라게 한 한국인식당, 나는 알바노동자였다” https://ildaro.com/10300)
급하게 옮겨지던 응급차 베드 위 유독 차가워 보였던 선배 직원의 발을 생각하며 며칠을 조용히 지냈다. 때로는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그 때를 제외하면 몸과 정신이 지하로 끌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가끔 울기도 했다.
 
나는 몸이 직접 미국으로 오기 약 7~8년 전부터 미국 영주권자였다. 부모님의 직업과 관련된 특별한 케이스였다. 미국 학교 진학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미국 거주 권리를 진짜로 “경험”해보자는 실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도 하기 전에, 같이 일하던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네팔 선배 직원의 갑작스런 죽음 며칠 후, 식당에 발생한 큰 화재 
 
사건이 발생하고 며칠 후, 그 와중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방 침대에 누워 텅 빈 것 같은 머릿속으로 ‘받지 못한 임금을 받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엎치락뒤치락 하던 중, 뉴욕에 먼저 와 살던 대학 동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봤다는 뉴스를 급하게 전해왔다. ‘다운타운에 있는 식당 한 곳에 큰 불이 났다는데 아무래도 네가 일하는 곳 같다.’고 했다. 내가 그 곳을 그만둔 걸 미처 몰랐던 친구는 내가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안부 연락을 한 것이다. 놀란 마음에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급하게 인터넷으로 뉴스를 찾아보았다.
 

뉴스 영상과 사진 속에선 내가 일했던 그 식당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주변을 통제하는 장면, 철 없는 몇몇 사람들이 화재 현장을 배경으로 웃으며 셀카를 찍는 장면,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화재 진압과 구조 작업을 중간 보고하는 장면은 작은 화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화면 속 저 곳에 있어야만 했을 수도 있다.
 
이전 선배 직원의 죽음을 계기로, 함께 그곳을 그만두었던 한국인 언니와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우리가 받지 못한 알바비를 받으러 함께 가자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는 그새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언니와 나는 그 일터를 떠날 수 없던 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랐고, 동시에 우리가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 밤에 나를 달래 주었던 지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혹여나 네가 살아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내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그곳을 떠나는 일이 나에겐 왜 이리 쉬웠나?’ ‘그들에겐 왜 그리 어려웠나?’
나의 죄책감과 안도감 모두 아무리 뱉어내도 입 안에 계속 남아 있는 모래알 같았다.
 
그 후 며칠 동안은 그 언니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확인했다. 그녀는 불이 난 식당의 사정도 들려오는 대로 전해 주었다. 단 몇 개만 기억에 남는다.
 
끝내 탈출하지 못한 남미 출신 청년 노동자의 장례식
‘그곳을 떠나는 일이 나에겐 왜 이리 쉬웠고, 그들에겐 왜 그리 어려웠나’
 
사고 당일, 나에게는 퉁명스럽기만 했던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남미 출신 청년이 탈출하지 못했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 직원들은 작은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주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언니는 매니저가 ‘화재로 식당의 모든 걸 잃은 상태라 언니와 나에게 남은 알바비를 정산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대로 체념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그 청년의 시신을 거의 일주일 가까이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던 언니가 하루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에서 그녀는 우리가 일하던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 청년을 보았다고 했다. 반갑지만 슬프기도 한 마음에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고, 사람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따지듯 물었다고 했다. 꿈 속 그 청년은 지하실을 가리켰고, 언니는 내내 그 곳에 있었냐고 물었다고 했다.
 

불이 나서 건물이 사라져버린 땅은 한동안 철망이 둘러있고, 거기에 간간히 꽃이 꽂혀있고, 작은 묘비가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간이 묘와 철망과 꽃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올라섰다. 이제는 그 때를 잊은 것 같은 풍경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장소에 아주 가까이 가는 것은 여전히 좀 어렵다. (촬영: 예성)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직원의 시신을 드디어 찾아 장례식을 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언니와 나는 ‘꿈이 맞았네, 언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언니와 나는 그 청년의 장례식에 함께 가기로 했다.
 
약 일주일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 직원의 장례식과 남미 청년의 장례식이 같은 날 열렸다.
선배 직원의 장례식은 함께 이민을 와 정착한 것처럼 보이는 가족들이 한껏 신경을 쓴 게 느껴졌다. 관도 색색의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슬픔을 나누려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 낯익은 얼굴들도 몇 보였다. 언니와 나는 굳이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 대신 멀찍이 서서 그들을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그 곳을 떠나 두 번째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뭐를 먹었던가? 장례식과 장례식 사이 우리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후에 도착한 남미 청년의 장례식은 앞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조금 더 어둡기도 했다. 사촌이라고 들은 한 남미 청년이 굳게 닫힌 관 위에 힘없이 기대어 울고 있었다. 크지 않았던 성모 마리아 상 그리고 그 앞에 있던 크지 않은 꽃 장식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언니와 나란히 앉아 있는데, 한국인 사장과 매니저가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앞, 대각선 방향으로 보이는 곳에 앉았다. 그들이 들어올 때 나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눈인사라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묘한 긴장감을 느꼈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고요한 장례식장을 떠나는 길에, 식당에서 일하던 요리사 아저씨들을 마주쳤다. 슬프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언제나 웃음기가 가득하던 키가 작은 한 요리사 아저씨는 사고 당일 현장에서 어깨와 목을 다쳤다고 했다. 나와 아저씨는 가벼운 허그로 인사를 나눴는데 그마저도 아파했다.
그러다가 아저씨가 조금 울었다. 우는 아저씨를 보다가 나도 조금 울었던 것 같다. 나와 언니가 아저씨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돌아섰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두 노동자의 죽음 목격으로 시작한 미국 이주, 그리고 기억과 망각 
새로 생긴 가스 스토브 확인 습관, 달라진 도시와 달라지지 않은 것들  
 
두 청년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내 일상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바빴던 대학원 석사 생활은 때때로 그 일을 잊도록 해주었다.
 
두 해 정도 지나 또 다른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박사 프로그램 지원에 필요한 시험을 치른 날, 지친 몸으로 근처에 있던 어느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동시에 한국인 남자 직원 하나가 나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얼굴이 낯익었다. 그도 나를 바로 알아봤고 조심스럽게 ‘그때 그 분 맞죠?’라고 물어왔다. 반가워하는 것도 습관인지 서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사이사이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평범한 안부와 근황을 나누었다. 둘 다 그때의 일들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같은 도시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불이 나 사라진 그곳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앞으로는 지나가기를 꺼려했다. 일행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해도 그곳을 피해 일부러 멀리 돌아갔다.
원래 있던 건물이 사라진 땅, 그 곳으로 가까이 갈 수 없게 둘러 놓은 철망, 그 사이에 간간히 꽂혀 있던 꽃들, 그곳에 만들어 놓은 작은 묘비. 길 건너에서 혹은 몇 십 걸음 떨어져서 보기만 했다.
 
몇 년 뒤, 약속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탔던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였다. 환승이 가능한 역이어서 플랫폼에는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 타고 있던 열차 안을 보면서 입구로 향했다. 거의 텅 빈 열차 안에 아주 낯이 익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몇 년 전, 남미 청년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던 매니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이 닫힌 열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진짜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기회가 사라졌다. 하지만 별로 의미 없는 추측마저 나를 다시 그 시간으로 돌려다 놓기엔 충분했다. 걷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는 박사생으로서 지난 몇 년을 버텨내는 동안, 내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네팔 청년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내 핸드폰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다. 작은 습관도 생겼다. 수업이나 약속이 있어 집을 나가야 할 때에는 가스 스토브를 적어도 세 번 혹은 그 이상으로 확인하고 나간다. 건물을 나갔다 하더라도 가끔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는 한다.
 
더 이상한 점은 내가 그 남미 청년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고 싶을 때에는 구글에 그 날의 사건을 입력한다. 그리고 기사를 찾아본다. 외워보려고 어딘가 적어놓아도, 혼자서 몇 번이나 중얼거려도 결국에는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기억하지 못했음 조차 잊고 지내다, 내가 또 잊고 지냈음을 다시 기억해낸다.
 
내가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는 동안, 건물이 있었던 터에는 대도시라면 어쩌면 당연한 변화가 일어났다. 간이 묘와 철망, 사람들이 꽂아 놓은 꽃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올라섰다. 이제는 그 때를 잊은 것 같은 낯선 풍경마저 익숙해졌지만, 아주 가까이 가는 건 여전히 조금 어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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