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 살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작업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자주 본다. 평범하고 싶었을 그들의 삶은 빵 공장과 철길에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사회에 알리고 바꾸기 위해 높은 건물 옥상, 대로변 신호등 위, 그리고 도로변에 세워진 작은 텐트 안에서 농성 중이라고도 했다.
미디어를 통해 보는 너무 잦은 노동자의 죽음 혹은 그에 가까운 고통은 금방 잊혀질 드라마 속 이야기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비극을 공유하게 되는 건 한 순간이다.
미국 이주 초기,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에서 알바하다
2015년 초, 무심한 척 했지만 걱정 가득한 가족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에 막 도착한 때였다. 나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대학원 학비는커녕 생활비를 충당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빈털터리였다. 때문에 영어나 전공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미주 한인 웹사이트들의 구인 공고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지원했던 대학원들로부터는 복수의 합격 소식이 들려왔지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나를 받아줄 곳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 기대 없이 이력서를 넣어 본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오픈 준비에 한참인 식당, 그 안쪽에 있었던 좁은 매니저 방에서 치른 면접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되고 끝났던 것 같다. 운이 좋았는지 정식으로 출근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일주일에 3-4일 나가면 되는 스케줄이었다.
출근 날, 어렵게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섰으나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식당 안 직원들은 나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낀 묘한 거부감은 일하는 동안 내내 견뎌야 하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매니저를 포함한 종업원의 절반 이상이 한국 이민자들 혹은 유학생들이기에, 언어 소통에 부담이 덜할 것이라는 점이 나를 안심시켰다. 최저 시급이 한국에 비하면 높았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좋은 위치 조건 때문인지, 일하는 날에는 정해진 20-30분 정도의 개인 휴식시간 말고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당연히 실수도 많았다. 테이블이나 바에 임의로 정해 놓은 번호를 잘못 외워 손님에게 제 값을 받지 못했던 날, 매니저는 내 일당에서 그 금액을 빼겠다고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물론 실제 그런 일은 없었다.)
또 한 백인 손님이 계속 주문한 ‘spicy mayo’(스파이시 마요네즈)를 알아듣지 못해, 마치 일이 너무 많아 깜빡 잊은 척하면서 일한 날도 있었다. 그저 예의상으로 물어보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답이 가능한 대화도, 긴장한 탓에 마냥 착해 보이는 ‘아시안 여성의 웃음’으로 무마시킨 적도 꽤 있었다. 우리말이든 완벽하지 않는 영어이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어를 아예 하지 못하는 한 남미계 직원과는 바디 랭귀지로만 소통했다. 배려는 없는 서로가 낯설어 퉁명스럽기만 한 손짓이었고 발짓이었다.
비록 내가 이리 어리숙할지라도 몇몇 직원들에게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남미 출신 요리사 아저씨들을 포함한 네팔에서 이주해왔다던 나와 동갑이었던 한 선배 직원과는 아주 작은 실없는 농담으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나가던 네팔 출신의 선배 직원
그렇게 케어 받으면서 일하던 중, 어느 날 그 선배 직원이 갑작스럽게 통증을 느끼다 쓰러졌다. 그가 구급차에 옮겨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실려 나가는 그를 보면서-정확히는 이불이 다 덮이지 못한 그의 맨발을 보면서- 나는 이제 그와 더 이상 친해질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구급차 베드에 실려 나가는 그 직원을 본 어느 손님은 이 식당의 평균 음식값 치고는 꽤 많은 팁을 남겼다. 누군가는 관심이 없었고, 누군가는 조금 흥분했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아 미국 사람들은 팁을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으로 사용하기도 하는구나. 내게도 저 팁을 나누어 주려나?’ 생각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상황에 맞지 않는 묘한 기대를 하던 나에게 실망감을 넘어 겁이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공포심(혹은 혐오심)은 나를 자기혐오로부터 보호하는 방패였다. 처음 보는 사장이라는 자가 뒤늦게 나타나, 평소 알던 한국인 알바생들에게 그에게 지병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알바생들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간장 병들을 정리하면서, 건조한 목소리로 모른다고 답했다.(아니라고 했을 수도 있다.)
사장은 나에게는 묻지 않았다. 난 어차피 알지도 못했고, 설사 내가 알았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의사가 아닌 이상 직원들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 장소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영업이 끝나고 가게 문을 닫은 시각, 다른 한국인 알바생들과 그가 이송되었다는 식당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놀란 마음을 서로에게 터놓았던 것 같다. ‘그가 결국 죽었다’는 연락을 길 위에서 받았지만, 누구도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병원에 도착은 했지만 무엇을 봤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가운 형광등 빛이 반사되던 하얀 병원 복도, 대형 병원 특유의 소음, 그리고 멀리서 보이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당황한 유가족들의 실루엣만 기억난다.
갑작스런 직원의 죽음 원인은?
곧 또 닥쳐올 비극의 전조와 남겨진 사람들
병원 밖으로 나온 알바생들 앞에 불쑥 다시 나타난 사장이 또 이상한 질문을 했다. 사장의 생김새, 목소리, 질문의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그의 말을 끊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었다. 그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매니저는 말 대신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결국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비인간적이라고 느꼈던 사장에게 용감하게 쓴 소리 한마디 해주지 못한 채로 병원을 떠났다.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임시로 방을 빌려 살던 동네로 돌아왔다. ‘하녀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주 좁은 직사각형의 방에 들어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천장을 보고 누우니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됐다. 무리 속에 있었을 때에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느라 느끼지 못했던 공포심과 죄책감이 느린 속도로 선명해졌다.
그대로 새벽까지 같은 자세로 누워, 미리 도착해 있던 친구와 가족의 연락들에 답하며 내가 본 것들을 문자와 통화로 알렸다. 가족들은 나와 동갑인 사람이 주어진 시간을 다 누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절친한 지인은 그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워하면서도 걱정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절대 너 때문이 아니야.”
그날의 기억 속 파편으로 남은 위로의 말들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사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득 그 일이 생각이 날 때마다 묻고는 했다. 그날 밤과 새벽 사이 어느 이주노동자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지인들에게 전하던 나는,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는지 자기고백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같은 날 밤, 알바생들과도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알바를 계속 해야 하는지 아닌지 서로 물었던 것 같지만,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다음날부터 그 식당으로 일하러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몇 안 됐지만 비슷한 결심을 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음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에, 사실 당시에는 그곳에 남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컸다. 그러면서도 아직 받지 못한 알바비를 아쉬워하다가, 함께 그만둔 동료 직원과 알바비를 받으러 가기로 약속했다. 식당으로 가야 할 날을 기다리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장의 돈은 받아서 뭐하나’라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적어도 수치심은 느낄 수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래서, 과연 식당을 그만둔 나와 동료는 알바비를 받아냈을까? 그런 질문은 무의미해졌다. 네팔 이주노동자의 죽음으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안되었을 때,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또 다른 비극이 잇따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땐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