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은 지워져서는 안 될 공공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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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밖 인터뷰⑧ 「기지촌 공공역사 구축을 위한 두레방 활동 고찰」 연구자 김태정
봄이 되면 언니와 배꽃을 찍으러 가곤 했다. 언니는 사실 꽃에 대한 감흥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배꽃을 같이 찍으러 간 것은 우리와 함께 마실 가고, 옛날의 마을 모습 얘기 해주고, 같이 사진 찍고.. 함께 하는 것이 좋아서일까 싶었다. (티제이 제공)    


[연구 소개] 김태정(이하 티제이)은 1986년부터 40년간 의정부, 동두천, 평택 등지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활동해온 ‘두레방’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기지촌 여성들의 일터이자 삶터, 국가폭력으로 인한 희생과 동시에 저항의 거처로서 기지촌을 조명했다. 
「기지촌 공공역사 구축을 위한 두레방 활동 고찰」 보고서는 기지촌의 역사를 공공역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본의 개발주의나 기지촌 흔적 지우기를 저지하고, 기지촌을 우리 모두의 기억과 반성의 장으로 만들 것을 촉구한다.
 
빼뻘마을 기지촌의 ‘언니들’과 두레방 활동가들
 
‘기지촌’은 미군 주둔지역에 미군의 유흥을 목적으로 형성된 성매매 집결지를 말한다. 빼뻘마을도 그 중 하나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옛 스탠리 부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지촌이다. ‘빼벌마을’의 이름은 마을의 배나무밭에서 붙여졌다는 설과,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기지촌에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국가의 기획과 관리 아래 국가 산업으로, 경제와 안보를 위한 자원으로 합법적으로 매매되고 착취되어왔다. 1986년 빼뻘마을에 자리잡은 단체 ‘두레방’은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의 보루로서 40년째 국가폭력에 저항해왔다.
 

티제이의 보고서에는 두레방을 만든 영웅적 명망가들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기지촌 언니(활동가들은 기지촌 여성을 ‘언니’라고 불렀다)들을 만나기 위해 동네 미용실에 매주 가서 “머리 10센티씩만” 자르며, 혹은 언니들 집에 라면을 세 개씩 가져가서 배고프다며 끓여달라고 하는 등, 언니들과 관계를 트기 위해 노력해온 활동가들이 나온다. 두레방 사무실 셔터를 내릴 때쯤 막걸리를 들고 찾아온 언니들에게 찌개를 끓여 내놓으며, 언니들의 고단한 삶의 보따리를 마주했던 이름 없는 활동가들이다.
그들은 언니들의 ‘탈성매매’를 도모하기 위해 두레방 빵을 만들고 팔러 다닌다. “빵은 사도 (기지촌 여성들이 만들어서) 먹지는 않겠다.”는 거절 아닌 거절의 말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공적 지원 없이 후원으로만 활동을 연명했던 상황에서 이들에게 ‘연대’는 생존이었다. 기지촌 공간의 역사와 현실을 공론화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농촌활동’(농활)처럼 ‘기지촌활동’(기활)을 와달라 호소하여 자원을 받고, 학생들과 연대한다. 기지촌을 답사하며 기지촌의 역사와 현장을 경험하는 ’기지촌 평화기행‘ 프로그램도 만든다. 카메라를 든 자원활동가들과 영화를 찍고, 소식지를 발행한다.
 
이 보고서의 특징은 ‘언니’들을 국가가 주도한 성매매 산업에 희생된 사람들로, 혹은 ‘민족의 누이’들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니들과 활동가들은 공동식사를 하고 공예 등의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기지촌 문제의 본질을 함께 찾아나간다. 그리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시작한다. 처음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만난 변호사로부터 ‘법리 해석이 어렵다’며 거절당했을 때의 분노와, 언니들의 진술서를 받으며 “언니들, 이 소송에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던 활동가로서의 부끄러움이 이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매년 성매매추방기간(9월 15일~9월 25일)이면, 시민들 대상으로 성매매 방지 캠페인를 열었다. (티제이 제공)    


보고서의 저자이자 18년째 두레방 활동가인 티제이를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어떻게 이 보고서를 쓰게 되었는지요?
 
“2012년 즈음 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할 때였어요. 두레방 이야기를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알고 보니 학생들이 기지촌을 모르는 거예요. ‘아 기지촌을 모를 수 있겠구나!’ 충격을 받았죠. 이전에는 기지촌 하면 ‘성매매’, ‘우범지역’, ‘미군범죄’ 같이 부정적으로라도 기억했는데, 이제는 아예 기지촌을 몰라요. 기지촌에 대한 사회적 기억 자체가 지워지고 있어요. 미군기지도 이전하고, 기지촌도 변하고…. 새로운 세대들은 알 수가 없겠지요.
 
그 이후에 질문이 계속 맴돌았어요. ‘기지촌이 얼마나 중요한데, 언니들도 여전히 (살아)계신데, 우리가 안 보이나?’, ‘왜 이 중요한 일들을 우리만 알고 있지?’ 그런 질문들이요. 그래서 이야기를 알려야겠다, 두레방의 40여년의 활동, 선배들의 이야기, 소식지, 자료집 등이 정말 많은데, 흩어져 있거든요. 이 자료들을 한데 모으고 싶다. 그런 부채감 같은 게 있었어요. 대학원에 온 이유이기도 하고요.”
 

-티제이는 ‘공공역사’로 기지촌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공공역사’라는 개념과 기지촌이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요?
 
“기지촌 역사에 관한 기록이 남성, 중앙, 학계, 의제를 중심으로 서술되어왔잖아요. 그 속에서 기지촌 여성은 외화벌이를 하는 성상품이 되고,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만 인식되어 왔어요. 존엄한 한 사람이 아니라요. 기지촌도 미군 부대의 오락용으로 이용되는 성매매의 공간으로만 보여지고, ‘수치스러운’ 기억이라고, 빨리 없애야 하는 공간이 되고 말아요.
 
하지만 공공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기지촌도 삶터이자 일터인 지역사회로, 다양한 행위 주체들이 관계 맺는 공간이었거든요. 기지촌 여성들도 섹슈얼리티로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행위 주체고요. 두레방에서 활동하면서, 파편화되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기지촌 공간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이런 문제의식이 공공역사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더라고요. 기지촌의 역사, 일상과 삶, 저항, 투쟁들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지촌 여성 당사자가 아니라, 두레방 활동가 인터뷰를 하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설날, 추석이 되면 의정부, 동두천, 파주에 계시는 내담자를 찾아 안부를 묻고 떡, 쌀, 생필품 등을 나눴다. 평소에도 찾아뵙고 안부를 묻지만, 절기별 안부는 더 반가워하셨다. 무거운 물품을 손에 들고 있지만 무겁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티제이 제공)    


 
“활동을 하면서, 두레방에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들이 되게 많았었어요. 미국 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도 많이 오고요. 기지촌이 군사주의, 제국주의와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등이 교차되는 지점이기도 하고, 특히 미국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군인이 다른 나라에 가서 여성을 착취하는 현장이기도 하니까요. 방문해서 인터뷰도 하고 연구도 하고 다큐멘터리도 만드는데, 만나고 가면 그냥 끝이죠. 언니들 입장에서는, 인터뷰하면서 공감도 하고 같이 기지촌을 돌아다니고 했는데, 그들이 가고 나면 자기 사는 건 그대로인 거죠. 박탈감을 느끼게 되죠.
 
저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발판 삼아서 뭘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담아야겠다 한 거죠. 활동가 얘기지만, 고스란히 언니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죠. 왜냐하면 계속 그 여성들하고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공공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활동한 게 바로 공공역사를 만드는 거라는 걸 알게 됐죠. 공공역사는 기억을 공유하는 주변의 존재들도 공공역사에 기여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당사자와 함께 역사로 만들어가는 주체들의 연대에 주목해요. 당사자와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의 활동가, 지원자, 행정시스템들도 모두 공공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보죠.”
 
〈기존의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기지촌 공간은 전쟁, 동맹, 안보, 경제 발전 및 개발 패러다임 속에서 역사화 되었다. 그러나 두레방 활동과 활동가들의 기억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 기지촌 공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서사를 발굴하고, 희생을 기반으로 형성된 경제 체계와 무분별한 개발 논리, 군사주의의 폐해를 가시화함으로써 기지촌 공간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여성주의적 접근은 기존의 역사 기록에서 소외된 부분들을 드러내고, 새로운 역사 서술의 길을 제시한다.〉 -김태정, 「기지촌 공공역사 구축을 위한 두레방 활동 고찰」, 2025:19쪽
 

-보고서 앞부분에 마을에 처음 온 활동가들이 기지촌을 ‘조용하고 환한 공간’으로 기억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슈퍼 앞 평상, 막걸리, 미용실, 빵공장, 공동 식사… 여지껏 내가 기지촌을 사람들이 지역과 얽히며 관계 맺는 곳, ‘마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기지촌을 소위 ‘수치스럽다’, ‘창피하다’고 하는데, 그런 역사도 우리 역사죠. 생각해보면 창피한 역사가 아니라 가슴 아픈 역사죠. 그런데도 그곳을 개발한다고 역사 지우기를 하고 있어요. 경기 북부 대부분의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되고, 2022년 빼뻘마을이 ‘새뜰마을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두레방 건물도 철거 위기에 놓여있거든요.
 
지금 두레방 건물이 과거 보건소로, 기지촌 여성들 성병 검진을 하던 곳이예요. 과거 정부가 기지촌정화위원회까지 만들고, 여성들의 성을 관리했던 살아있는 증거들이죠. 여기를 철거한다는 건,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역사를 모두 지우겠다는 거예요. 동두천시도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병관리소 건물을 철거하고 관광지로 만든다고 해요.
 
기지촌 흔적을 지우면, (역사의 과오가) 지워질까? 저는 아니라고 봐요. 지금도 여전히 기지촌은 존재하고 있고, 한국 여성들이 동남아에서 온 이주여성으로 바뀌었죠. 군산 아메리카 타운도 미 공군의 출입금지 조치 이후에는 고객이 한국 남성 대상으로 바뀌었어요. 역사를 지우면 또다시 여성 또는 힘없는 사람들이 그 희생의 대상이 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거예요.
 

두레방 건물은 과거 보건소 건물이었던 곳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강제적 성병 검진을 받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빼뻘마을이 새뜰마을로 선정되면서 의정부시는 해당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을 알려왔다. 두레방은 건물의 존치를 주장하며, 기지촌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티제이 제공)    


그래서 기지촌 역사를 지우지 말자고, 기지촌을 다양하게 조명할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들자고 기자회견도 하고 마을 예술가들과 전시도 하고, 포럼, 미디어 작업도 하면서 알려나가고 있어요.”
 

-기지촌의 역사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깨닫게 되네요. 보고서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두 가지가 있어요. 그 한 가지가 2022년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인데요. 이 재판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에, 혼자 일어나 박수쳤던 기억이 있어요. 근데, 이 소송을 법조계나 활동가들이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두레방이 시작된 1986년부터 언니들하고 공동식사, 공예, 그림치료 같은 치유 프로그램을 장기간 진행해왔는데, 언니들과 깊은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적으로 제안된 거지요. 기지촌 공간의 성착취를 가능하게 한 구조는 국가폭력이라는 거, 이걸 규명하고 (국가로부터) 사죄받고 책임질 수 있게 하자는 이야기로 모아졌어요.
 
국내에서 어려울 것 같다고 해서 국제 소송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2004년도에 스위스에서 변호사들이 두레방에 왔을 때 자문을 구하니, 당사국 내에서 소송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2008년 한소리회 회원단체들하고 국내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는데, 변호사가 없는 거예요. 공익법 활동을 하는 변호사에게 이 소송을 의뢰했죠. 이 분이 논의해보겠다고 갔는데, 힘들다고 답변 받았어요. 국가폭력이 드러나야 하는데 법리 해석이 어렵다고. 준비한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죠.
 
그러다가 2013년쯤에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변호사 한 분이 할 수 있다고 하셔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기존 진술서보다 자세한 내용이 필요하다 해서 몇 번을 언니들 만나면서 만들었어요. 두레방 뿐아니라 다른 단체도 함께해서 결국 122명 원고인단이 준비되었고, 결국 승소했죠.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이 국가폭력을 인정받은 사례예요. 저도 놀랐어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다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고, 이슈 파이팅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언니들한테 진술서 받으면서도 “이거 이기기 어려우니까 잊고 살아요.” 그랬어요. 언니들한테 미안하죠. 아쉬운 게, 언니들이 재판 중간에 많이 돌아가셨어요. 승소했을 때 95분이 남아계셨으니까요.”
 
-보고서에서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게 ‘두레방 데이’ 부분이에요. 상담이나 긴급구제 등의 활동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연도 있었다는 게 좀 놀랐어요.
 
“공연까지는 아니고요. 일 년에 한 번 노래자랑 같은 무대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엔 연대의 자리가 되었어요. 1990년대 이후 기지촌 여성들이 이주여성으로 바뀌면서, 이분들이 예술비자로 한국에 왔는데 강제로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상황이 되었거든요. 이분들이 노래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런데 뽐낼 데가 없잖아요. 미등록 체류라서 어디 대회도 못 나가가고요. 그래서 무대를 만들고 싶었죠. 다행히 같이 할 활동가가 있었죠. 그 활동가 없었으면 못했을 거 같아요. 2013년 시작해서 코로나 전까지 계속했어요. 7년 정도 이어갔어요. 노래자랑하고, 상장도 주고, 상금도 줬어요.
 
외부에 공공연하게 알리지는 못했죠.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내담자들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두레방 프렌즈’라고 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두레방에 관심 있고 여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초대했죠. 세세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막상 행사 때는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야. 근데 재밌어. 두레방 데이가 재밌는 게 포트락을 하거든요. 각자 음식을 싸 와요. 그러면 러시아 음식, 필리핀 음식, 한국 음식… 글로벌한 식탁이 차려지죠. 두레방 한글 교실에 다니거나 내담자분들, 거의 다 활동하시는 분들이라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좋아했어요.

이주여성 한글교실. 1986년 두레방이 처음 오픈했을 때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영어교실이 있었다면, 2000년대 중순에는 한글교실이 있었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일들이 빈번했다. 그런 경험을 상담 통해 알게 되면서 한글교실을 열었다. (티제이 제공)    


 
나중에는 이주여성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했죠. 본인들이 호스트가 돼서 손님 오면 맞이하고 다양한 기획들도 많이 했어요. 이주여성의 자녀들도 와서 참여했는데, 미술을 좋아하는 친구가 페인팅하고…. 너무 멋있었어요. 저는 총괄을 했죠. 아침에 동두천에서 여성들 데리고 오고, 갈 때 데려다 주고. 천막치고, 사진 찍고, 치우고, 게임 준비하고…. 닥치는 대로 하죠. 이런 행사 하고나면 뒤풀이하거나 막 이러잖아요. 우린 힘들어서 못 해. 그냥 각자 빨리 집에 가야 돼요.”
 

-티제이의 18년간의 활동을 이 보고서로 정리한 셈인데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평화학자이자 기지촌 연구를 하신 정희진 선생님은 기지촌 여성운동에 대해 ‘평화와 인권의 화두를 풀 수 있는 핵심 열쇠’의 가능성을 말씀하셨는데, 활동하면서는 그런 걸 실감하기 어려웠어요. 너무 바쁘고 행정에 쫓기고요. 그래도 기지촌 여성운동이 기지촌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냈고, 당사자 인권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 일찌감치 탈성매매 프로그램도 만들었고요. 법적으로도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하고, 불충분하지만 인신매매법도 통과가 되고.… 두레방 혼자 힘으로 못했죠.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조금씩 나아간 거 같아요. 제 보고서는 그런 이야기를 다 다루지는 못했는데요. 그래도 흩어진 자료를 모아서 목록을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어요.”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되었던 빼뻘마을은 티제이의 보고서에서 고유한 자기 서사를 가지고 살아난다. 이 고유함 속에서 여성들은 ‘주류’에서 밀려났지만 ‘공공’에서는 밀려나지 않았음을,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공공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증명한다.
 
티제이는 공공역사와 기지촌을 만나게 함으로써 기지촌이 부끄러운 기억, 피해의 역사가 아니라, 부당한 국가폭력에 저항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는 현재진행형의 실천이자 인간으로서 존엄의 실현이라고, 폭력과 불평등에 무뎌져 가는 우리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라고 말한다. 도시 개발로 기지촌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은, 기지촌의 건물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공역사를 지우는 것이며, 울리고 있는 경종을 틀어막는 일일 것이다.
 
[필자 소개] 호미. 동화집필노동자, 한국양성평등교육원 농촌 성평등 교육활동가.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 한살림 세종 농산물위원회 위원. 『자질구레 신문』, 『사랑에 빠진 도깨비』 등의 동화집을 냈다. 성공회대 승연관에서 숙식을 해가며 논문을 썼는데, 재밌고 다정하고 호된 시간이었다. 노동강도가 높았던 티제이는 휴일에나 승연관에 나타났는데, 지극정성 굴국밥을 해준 이가 호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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