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영국 브라이튼 프레스턴 파크에서 열린 ‘브라이튼 프라이드(Brighton Pride) 2025’에서 공연한 팝의 전설 머라이어 캐리는 트랜스젠더 플래그가 연상되는 핑크와 블루 드레스를 입고 “인형을 지켜라”(Protect the Dolls)라는 문구가 쓰인 핑크 재킷을 입었다. 이에 많은 팬들은 “역시 퀸!”이라며 호응했다.
영화 배우 틸다 스윈튼, 페드로 파스칼, 가수 트로이 시반, 찰리 XCX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이 흰색 바탕에 심플하게 “인형을 지켜라” 글씨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등장하고 있다. 유명 브랜드 의류여서 스타들이 입는 게 아니다. 현재 트랜스젠더 커뮤니티가 직면한 정치적/사회적 어려움에 대해 알리고, 강력한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패션 디자이너 코너 아이브스(Conner Ives)가 2월 20일~24일 진행된 2025년 가을 런던 패션 위크 피날레 때 입고 등장하면서 알려진 이 티셔츠엔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트럼프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인형을 지켜라!”
먼저 “인형을 지켜라” 티셔츠가 등장하게 된 중요한 원인부터 짚고 가자. 그건 다름 아닌 트럼프 2기 행정부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시절부터 이주민과 퀴어, 여성 등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리고 올해 2기 행정부를 꾸리자마자 여러 반트랜스/반퀴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2025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생물학적 본질주의적 성별 이분법을 지지하고 트랜스젠더와 퀴어 커뮤니티를 무효화하고 지우려는 일련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10일 동안 19세 미만을 위한 트랜지션(transition,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게 사회적 성별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신체 변화, 법적 성별 정정 등이 포함된다) 진료 금지, 트랜스젠더 군복무 제한, 성정체성을 근거로 한 차별방지 규정이나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프로그램 철폐, LGBTQ+ 청소년 위기대응 핫라인 중단 등의 추가명령에도 서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인형을 지켜라”라는 슬로건이다. 앨라이(Ally, 지지자/연대자)들, 즉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민들이 트랜스젠더 평등을 위한 싸움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코너 아이브스는 자신의 티셔츠 판매 수익금 전액을 최초의 트랜스젠더 위기 핫라인이자 비영리 단체인 ‘트랜스 라이프라인’(Trans Lifeline)에 기부하며, 이 운동의 실제적인 영향력을 보여줬다. (4월까지 30만 달러 이상 모금)
아이브스는 보그(Vogue)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의 트랜스젠더들이 직면한 도전을 생각하면, 뉴욕 교외의 부유한 집에 살았던 나조차 12살 게이 백인 소년이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하물며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본적으로 말하는 행정부 아래, 미국 중부에 사는 트랜스젠더 소녀라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며 트랜스젠더와의 연대를 밝혔다.
스스로를 “인형”이라고 부른 트랜스여성들
근데 “트랜스젠더를 지켜라”가 아니고 왜 “인형”이라고 하는 걸까? 사실 이 단어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페미닌(transfeminine) 성향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애칭이다. 미국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내에서는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인형”은 현대 LGBTQ+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뉴욕시의 볼룸(ballroom) 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회에서 배제되기 쉬웠던 트랜스여성들은 자긍심을 갖기 위해 예쁘고 귀여운 ‘인형’을 자신들을 부르는 단어로 쓰기 시작한다. 당시 트랜스젠더 퍼포머였던 레이디 샤블리스(The Lady Chablis)는 ‘인형’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꼽힌다. 그는 스스로를 “위대한 여제”(The Grand Empress) 또는 “인형”이라고 불렀다. 한 인터뷰에서 “‘인형’은 나의 환상적인 캐릭터이자, 즐거운 이름이다. 내가 공연을 위해 차려 입을 때, 나는 ‘인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2023)가 만들어질 때, 트랜스젠더이자 배우인 하리 네프는 감독과 제작진에게 자신이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편지를 써서 인형과 트랜스여성과의 연관성을 설명했다고 한다. “우리 트랜스여성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절대 될 수 없는 것, 되고 싶어 하는 것… 그 모든 걸 알기에 우리 스스로를 ‘인형’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트랜스여성들은 인형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됐을까? 켄터키 대학교의 2023년 논문에 따르면, ‘인형’이라는 표현은 아름다움, 스펙터클, 그리고 어느 정도 의도적인 여성성의 사회적 구성과 관련이 깊다고 분석한다. 학자 퀸 J. 트로이아(Quinn J. Troia)는 ‘인형’의 상징이 “완벽하게 보여지고 그 아름다움과 의도적인 구성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이상적인 여성성 모델을 요약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 깊이 공감되는 주제일 수 있다는 것.
물론 모든 트랜스여성이 자신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형’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갖는 이도 있다. 또한 이 단어는 호르몬 치료(HRT)나 성확정 수술을 받은, 여성스러운 트랜스여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이 ‘충분히’ 여성스럽지 않다고 여기는 트랜스여성은 ‘인형’이라는 말에 부담을 표하기도 한다. ‘인형’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 의미-인간 아님, 모방품, 복제품 등-으로 인해, 이 단어의 사용을 거부하는 트랜스여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인형’은 여전히 ‘문제적’인 단어이다. 하지만 퀴어 커뮤니티 내의 대표적인 용어인 ‘퀴어’(queer, 원래 ‘이상한, 기괴한’ 등의 부정적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오히려 자긍심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긍정적 용어로 적극 해석하여 전유함)조차 그런 논쟁 속에서 자리잡은 역사가 있다. 어떤 단어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의해 다시 의미화되고, 소유된다.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삶’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들
“인형을 지켜라” 액션은 비록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을 ‘인형’이라고 부르지는 않더라도,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진실을 상징한다. 이유는 명백하다. 트랜스젠더 또한 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은 퀴어/트랜스젠더를 잃고 있다. 그동안 퀴어/트랜스젠더를 향한 차별과 배제, 혐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 2기에 들어서면서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정책과 제도가 이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이와 더불어 퀴어/트랜스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미국에선 지난 1월 트랜스젠더 참전 군인이 자살한 사건이, 2월엔 트랜스남성이 혐오범죄로 살해당한 사건이, 3월엔 남성 동성커플이 살해된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4월, 15살인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 사실 이외에도 더 많은 부고 소식이 있다. 이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낯선 일이 아니며,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 죽음들이 있다.
그렇기에 더욱 강력한 연대자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상영중인 영화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의 주연 배우인 페드로 파스칼도 지난 4월, 영화 〈썬더볼츠〉의 영국 런던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여할 때 명품 양복 대신 “인형을 지켜라” 티셔츠를 입었다. 자신의 50번째 생일 파티에서도 마찬가지. 그는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다.
“인형을 지켜라”는 단순한 문구 혹은 지금 유행하는 티셔츠가 아니다. 이는 공동체가 함께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삶’의 존재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는 선언.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다양한 소수자를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퇴행 위기에 놓인 성교육 정책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참고: 서울시 ‘성교육 정책 퇴행’ 바로잡아야 https://ildaro.com/10237), 故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며 트렌스젠더의 삶과 커뮤니티를 지원하기 위한 변희수재단이 설립 허가 서류를 제출했음에도 무시, 방관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에 항의하기(법인 설립 촉구 서명 캠페인 참여하기 https://zrr.kr/a4w8bw)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도 인권을 위해 목소리 내는 연대자가 필요하다.
[참고 자료]
-“The Lady Chablis”, [Transgender History Month](트랜스젠더 역사의 달) 웹사이트
-“What Is a “Doll” and Where Does the Term Come From?”, Denny, 미국 퀴어 매거진 [Them] April 30, 2025
-“Every Celebrity Who Has Worn Conner Ives’ Viral “Protect the Dolls” T-Shirt”, Sam Manzella, Mikelle Street, and James Factora, [Them] June 10,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