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들 차별하는 부모님 생각을 바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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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의 영화뜰]
▲ 영화 '양양' 스틸컷
"이성적으로는 똑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빠 마음속에서도 아들 쪽으로 0.1g이라도 더 무게가 가지 않았었나…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솔직히 너보다는 아들 ○○가 머리가 더 좋고, (딸인 너 보다도) 그 애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봐야지."

다 큰 딸과 중년의 아버지가 마주 앉았다. 딸은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가풍과도 같은 남아선호사상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답이 지나치게 솔직해서 아무런 관계없이 바라보던 사람의 기분마저 좀 떨떠름해질 정도다. 딸이 볼 멘 목소리로 "왜 남동생이 나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돌아오는 아버지의 답은 더 난감하다. "할아버지가 ○○이 어렸을 때 사주를 보니까 거목, 나라의 큰 기둥이 될 거라고 하더라고."

그 장면쯤부터 이 다큐멘터리가 그간 영화와 드라마, 책, 뉴스 등을 통해 너무나도 많이 다뤄져서 자칫 진부한 의제로까지 느껴질 정도인 '가부장제'와 '가족 내 성차별'을 아주 힘 있는 방식으로 다시금 소환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남자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미묘하고도 분명한 차별을 겪으며 자라온 누나나 여동생이라면, 아마도 작품을 보는 동안 속에서 천불이 일 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가족 내 성차별 정서'가 곳곳에서 실감 나게 드러나서다.

▲ 영화 '양양' 스틸컷
공교로운 건 이 집안이 비교적 화목한 분위기를 지닌 평범한 모습이란 거다. 그러니 딸인 양주연 감독이 그 평화로운 일상 뒤에 숨겨진 고루한 가치관을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갈등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를 손에 쥔 채 자기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여자가 어디 상황을 그렇게 흘러가게 두겠는가. 양 감독은 그간 집안에서 느꼈던 의아한 차별들에 대해 질문하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는 반복적인 상황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게 2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양양'이 풀어내는 용감한 이야기다.

제목이 '양양'인 데는 이유가 있다. '양 씨 아가씨'라는 뜻이다. 지칭하는 건 양 감독이 아니라, 그의 고모다. 젊은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은 1950년대생 고모가 있었다는 걸 양 감독은 다 큰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사정이 궁금해 물으니 아버지는 '잘 모르겠다고'만 한다. 대학생이었던 고모의 사망신고 시점이 고등학생 때로 돼 있다는 사실은 더욱 석연치 않다. 사망신고는 고인의 가족이 하는 것이니, 가족들이 그 죽음에 관한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양 감독은 결심한다. 고모의 옛 친구들을 수소문해 만나보기로. 그리고 알고자 한다. 고모 삶의 마지막 장면에 숨겨져 있는 그 어떤 비밀들이, 혹여라도 자신이 오래도록 경험해 온 이 집안의 부당한 문화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를.

▲ 영화 '양양' 스틸컷
우려 섞인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고모는 공부를 잘해 서울로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여자라서 안 된다'던 할아버지의 반대로 광주 조선대학교에 입학했고, 가부장적이고 집착적인 남자친구를 만난 뒤 그의 집에서 독극물을 마신 채로 발견됐다. 그러나 그 죽음이 진짜 자살인지, 데이트폭력으로 인한 비극인지는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가족이 진위를 따지지 않고 사건을 조용히 덮은 까닭이다. 사망 시점이 조작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카메라 앞에 앉은 양 감독의 어머니는 그 대처가 "이해된다"고 말한다. '다 큰 딸이 외간 남자 집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걱정됐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 고모와 마찬가지로 한 집안의 다 큰 딸의 입장으로 살아온 양 감독은 마음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고 올라온 듯한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질문한다. "어느 날 내가 고모처럼 남자친구 집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엄마는 어떻겠어." 그제야 찾아 드는 모녀 사이의 당황스럽고도 부끄런 침묵에 관객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양양'이 무심한 관객의 심정까지도 요동치게 만든다면 그건 오롯이 양 감독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이같은 용감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제 밥벌이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성인은 자기 뜻에 따라 원가족과 거리를 두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양 감독은 그러는 대신 관습적인 가족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불편한 것을 바꿔나가 보기로 한다. 가족 묘비에서 빠져 있는 고모의 이름을 다시 새겨주자는 구체적인 제안과 함께. 그건 그로 인해 생겨날 가족들 사이의 고통스러운 불협화음까지도 함께 짊어지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양 감독과 같은 성별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성으로서 그의 용기와 노력이 가족에 대해 얼마만큼 정성스러운 태도를 지녀야만 가능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에, '양양'의 작업 과정에 진실한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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