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오는 27일 취임 3주년을 맞는다. 25일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5주기다. 그룹 안팎의 의미 있는 이정표가 겹치는 시점이지만 올해 역시 별도 행사나 공식 메시지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조용한 리더십 기조가 이어지는 분위기다.
지난 20일 용인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선대회장 5주기 추모 음악회를 시작으로 24일에는 수원 선영에서 비공개 추도식이 이어진다. 이 회장을 비롯한 유족과 사장단이 참석할 예정이다. 27일 취임 3주년에도 별도 행사는 없지만, 내달 1일 창립기념일과 맞물려 경영 메시지가 나올 가능성은 남아 있다.
올해 초 삼성 주가는 요동쳤고 실적 부침도 컸다. 하지만 이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는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돌파구를 모색해왔다. 대법원 무죄 확정으로 사법 족쇄를 완전히 털어낸 그는 반도체 초격차 복원과 '뉴삼성' 구상 실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 들어 중국과 일본, 미국, 유럽을 잇달아 방문하며 글로벌 현장 경영을 재개했고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굵직한 M&A와 협력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재계는 이번 3주년을 '뉴삼성' 청사진을 구체화하는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엔비디아와의 HBM4 협력, 연말 인사를 통한 조직 재편 등 굵직한 변수가 맞물리며 그의 리더십이 한 단계 진화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암흑기 끝자락…움직이는 반등시계
이재용 회장의 반등 시계는 올 초부터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2월 항소심 무죄 선고 이후 중국과 일본을 잇달아 방문하며 글로벌 현장 경영에 나섰다. 3월에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한 글로벌 CEO 40여명과 함께 '국제공상계 회견'에 참석, 이어 샤오미 전기차 공장과 세계 최대 전기차업체 BYD 본사를 찾아 전장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삼성전기는 4월 BYD로부터 차량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대량 공급 승인을 확보했다. 수천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해당 계약은 이 회장의 글로벌 행보 이후 체결된 첫 대형 성과였다. 업계는 "이 회장이 중국 내 공급망 복원과 전장 사업 확대의 신호탄을 쏜 셈"이라고 평가했다.
글로벌 무대 복귀와 함께 대형 M&A 전선도 다시 가동됐다. △하만의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 인수 △독일 플랙트 인수 △디지털 헬스케어 젤스와 생명공학 기업 그레일 투자 등 2017년 이후 8년 만에 굵직한 거래들이 잇따르며 '뉴삼성' 윤곽이 뚜렷해졌다.
7월 대법원 무죄 확정 이후에는 반도체 전선이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삼성전자는 AMD의 신형 AI 가속기(MI350X·MI355X)에 HBM3E 12단 제품을 공급하며 품질 신뢰를 입증했고, 파운드리 부문에서는 테슬라와 수십조 원 규모의 수주 계약을 따냈다. 애플과의 협력도 확대되고 있다. 3분기 DS(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은 5조원 이상으로 전분기 대비 10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올 3분기 삼성전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분기 매출 80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은 12조1000억원으로 2년 만의 최고치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사업 포트폴리오 재정비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HBM4 동맹' 이재용의 다음 승부수
AI 인프라 동맹도 본격화됐다. 최근 이 회장은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만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전 세계 주요 기업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는 초거대 AI 연산을 뒷받침할 차세대 데이터센터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월 90만장의 웨이퍼가 투입되는 방대한 규모로, 사실상 'AI 시대 전력망'을 세우는 프로젝트로 불린다.
삼성전자는 이 구상의 핵심 공급 파트너로 참여한다. 고성능·저전력 D램과 SSD 등 메모리 솔루션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AI 연산 효율을 극대화하고, 글로벌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기술 리더십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업계는 "이 회장이 직접 주도한 글로벌 AI 인프라 협력은 삼성 반도체의 위상을 다시 각인시킨 상징적 장면"이라고 평가한다.
이 회장은 동시에 인재 확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디자인 전문가 마우로 포르치니와 TSMC 출신 반도체 개발자 마거릿 한을 영입했다. 8월에는 임원 장기성과인센티브를 재개하고 전 직원 성과연동 주식보상제를 도입했다. "사람이 경쟁력"이라는 철학을 실질적 제도로 확대한 셈이다.
남은 과제는 반도체 초격차 복원이다. 차세대 HBM4 기술 경쟁력 확보, TSMC와의 격차 축소가 핵심이다. AI·바이오·로봇·차세대 통신 등 미래 성장축의 완성도도 높여야 한다.
이달 3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이 회장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직접 만날 가능성에도 이목이 쏠린다. 삼성전자가 차세대 HBM4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엔비디아는 내년 출시할 차세대 AI 칩 '루빈'에 HBM4를 탑재할 계획이다. 업계는 이번 회동이 사실상 'HBM 동맹'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양측은 HBM4의 개발 현황과 생산 시점·공급 안정성·성능 향상·가격 조건 등 구체적 로드맵을 놓고 실질적인 논의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엔비디아의 주요 협력사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다. 특히 SK하이닉스가 HBM3E 공급을 주도하고 있지만 내년부터 시작될 HBM4 경쟁에서는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후발주자로서 내년 상반기 HBM4 양산을 목표로 품질 검증과 생산 체계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는 이번 회담이 엔비디아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성과 중심·세대 교체, '뉴삼성' 인사 시그널
연말 인사도 핵심 변수로 꼽힌다. 삼성은 최근 2년 연속 11월 말 사장단과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올해 역시 비슷한 시점이 유력하다. 이번 인사는 이 회장이 대법원 무죄 확정 이후 처음 맞는 정기 인사로 '뉴삼성' 체제의 방향성을 가늠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 회장이 경영 정상화의 첫 해를 마무리하며 어떤 인사를 단행하느냐에 따라 삼성 조직 구조와 의사결정 체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성과 중심 경영 기조를 강화하면서도 미래 성장축을 이끌 세대 교체 인사가 병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재계 일각선 이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과 함께 그룹 컨트롤타워 재건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간 삼성전자 중심으로 분산됐던 의사결정 구조를 삼성물산과 금융 계열까지 통합해 보다 유기적인 전략 체계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뉴삼성'이 단일 기업의 혁신을 넘어 그룹 전체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단순 인적 쇄신을 넘어 이 회장의 리더십이 제도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될 것"이라며 "사법 리스크로 그간 제약됐던 경영 의사결정 구조가 정상화되는 첫 해인 만큼 조직의 체질을 새롭게 다지고 미래 사업의 방향성을 구체화하는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