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이 SK실트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지주회사 자격을 일시적으로 상실할 정도로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면서 실탄도 넉넉히 확보했다는 평가다.
두산이 SK실트론을 품에 안게 되면 반도체 산업을 그룹의 핵심 사업 영역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관측된다. 두산 내 전자 BG사업부, 두산테스나와 함께 삼각편대를 꾸릴 전망이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두산은 SK그룹과 SK실트론 매각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 대상은 SK가 보유하고 있는 SK실트론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계약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지분 19.6% 등 총 70.6%다.
지난 여름, 실탄 쌓았다
SK그룹이 SK실트론 매각 계획을 수립했을 초기 두산 역시 인수 대상자로 꼽혔지만 우선순위에서는 제외됐다. 당시 두산이 SK실트론을 인수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와 함께 자금력이 풍부한 사모펀드 여럿이 SK실트론을 노리고 있어서였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여름부터다. 올해 3월까지만 하더라도 두산의 별도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 규모는 1487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6월에는 갑자기 1조7380억원으로 1조2450억원이나 늘었다. 3개월 사이 1조원이 넘는 현금을 마련한 거다.
급작스럽게 현금이 늘어나면서 자산총액 중 자회사 주식가액 50% 이상을 유지해야 하는 지주회사의 자격도 상실하게 됐다. 이 역시 M&A를 위해 감내한 거라는 평가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비금융회사 지주회사가 지주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지주사로서의 강점인 지배구조 투명성, 사업 포트폴리오 안정성에 부담이 가게 된다"라면서도 "두산은 이를 포기할 정도로 급박하게 현금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이번 M&A에 적극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관건은 이렇게 마련한 현금을 안정적으로 차입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거다. 현재 두산이 확보한 현금성 자산 대부분은 자회사의 주식을 담보로 한 대출인 것으로 평가된다. 6월 기준 이 회사의 단기차입금 규모가 1조7830억원에 달하는데 이 중 대부분이 두산로보틱스나 두산에너빌리티 등 핵심 계열사의 주식을 담보로 빌린 대출인 것으로 확인됐다.
앞선 관계자는 "대규모로 현금을 조달하기는 했지만 핵심 계열사 지분을 담보로 했기 때문에 차입 상환에 차질이 생기거나 주가 변동시 마진콜 위험 등 리스크로 인해 지배구조가 흔들릴 여지가 있다"며 "안정적인 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조달한 자금이 현재는 두산 내 BG사업부나 SK실트론 인수에 쓰일 거란 분석이 많은데 반도체 시장에 안착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보여진다"라며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지만 반대로 보면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반도체에 대한 자신감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SK실트론 찜한 이유
SK실트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반도체용 웨이퍼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웨이퍼 시장에서 10% 안팎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글로벌 5위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라는 우군을 확보해 안정적인 고객사도 갖췄다는 평가다.
특히 반도체 업계가 대호황을 맞으면서 당분간 호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상반기 SK실트론의 매출은 9802억원, 영업이익은 916억원으로 매년 30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벌어들이고 있다.
SK그룹 입장에서는 그만큼 '알짜'지만 그룹 전체의 사업 리밸런싱을 위해 매각을 택했고 먹거리 확장을 모색해온 두산의 구미를 당긴 것으로 보인다.
두산이 SK실트론을 노린 것은 반도체 산업을 그룹의 핵심 사업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두산은 두산 내 전자 BG사업부가 동박적층판(CCL) 등을 엔비디아에 납품하며 엔비디아 훈풍을 누리고 있다. 이같은 모멘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도체 밸류체인에 더욱 깊게 관여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거다.
특히 또 하나의 반도체 날개인 두산테스나가 올해 부침을 겪고 있는 점도 SK실트론 인수를 고려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두산테스나는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적자를 기록하면서 두산의 아픈손가락이 됐다. 한때 한국거래소의 코리아밸류업 지수에 포함됐지만 연이은 실적 부진 등으로 올해 초 제외됐다.
두산테스나의 실적 부진은 두산테스나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긴 하다. 두산테스나는 시스템 반도체를 웨이퍼 단계에서 테스트 하는 사업이 핵심이고, 이 사업의 최대 고객사는 삼성전자다. 매출 대부분이 협력사인 삼성전자에서 나오는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대규모 적자를 내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이 파고를 고스란히 맞게된 것이다.
두산이 SK실트론을 품는다면 두산테스나는 고객사 다양화를 꾀할 여력이 생긴다. 두산테스나의 핵심 사업 영역은 반도체 후공정 작업이고 SK실트론은 반도체의 기초 소재인 웨이퍼 생산 기업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사업적 연결고리는 없다. 단, 웨이퍼에 대한 이해도와 테스트 데이터 연계 등을 통해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 테스트 신뢰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다양한 고객사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두산 역시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일부 고객사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평가가 있었다"라며 "SK실트론 인수를 통해 웨이퍼라는 신시장을 개척하고 기존 사업영역과의 시너지도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