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SK가 동시에 오픈AI(OpenAI)와 손잡고 초대형 AI 인프라 구축에 뛰어든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같은 날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면서, 4000억~5000억 달러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한국 양대 그룹이 나란히 합류하는 구도가 그려졌다. 글로벌 AI 산업 패권 경쟁서 한국의 위상이 한층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힘을 얻는다.
풀 라인업 앞세운 삼성…AI 수요 전방위 대응
1일 삼성은 서울 서초사옥에서 오픈AI와 글로벌 AI 핵심 인프라 구축을 위한 LOI(의향서) 체결식을 진행했다. 삼성전자·삼성SDS·삼성물산·삼성중공업 등 4개사가 참여했으며,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오세철 삼성물산 사장·이준희 삼성SDS 사장이 자리했다.
앞서 이재용 회장은 지난 2월 항소심 이후 첫 공식 행보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올트먼 CEO와 3자 회동을 가진 바 있다. 당시 논의된 의제가 바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였다. 이번 LOI 체결은 이를 구체화한 행보라는 평가다.
삼성은 이번 협력에서 특정 제품군을 한정하지 않았다. HBM뿐 아니라 DDR5, LPDDR 등 고성능·저전력 메모리 전반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통해 다양한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풀 라인업을 갖춘 삼성의 포트폴리오 유연성이 오픈AI 협력의 핵심 경쟁력"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메모리 전통 강자인 삼성전자는 HBM과 DDR5 등 AI 학습용 핵심 제품군을 이미 대량 공급하고 있다. HBM3E, HBM4로 이어지는 차세대 로드맵을 확보해 오픈AI의 대규모 D램 수요에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스타게이트는 오픈AI가 향후 4년간 400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미국 전역에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차세대 생성형 AI 모델 학습을 위해 웨이퍼 기준 월 90만장 규모의 고성능 D램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일 고객 기준으로는 전례 없는 규모다.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를 아우른 '종합 반도체 기업'이라는 점도 차별화 요소다. AI 학습·추론 전 과정에 필요한 GPU와 AI 가속기용 칩을 패키징 단계에서 최적화해 제공할 수 있어, 메모리와 로직을 동시에 공급하는 삼성만의 포트폴리오가 부각된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공급망을 책임진다면 다른 계열사들은 인프라와 서비스 확장에 힘을 보태는 구도다. 삼성SDS는 데이터센터 설계·구축·운영 협력을 맡는다. 국내 최초로 오픈AI와 리셀러 계약을 맺어 기업들의 'ChatGPT 엔터프라이즈' 도입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삼성물산과 삼성중공업은 해상에 설치하는 차세대 '플로팅(Floating) 데이터센터' 공동 개발에 나선다. 냉각 효율과 탄소 절감 효과를 앞세운 미래형 인프라로, 부유식 발전설비와 관제센터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삼성은 이번 협력을 한국이 글로벌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반도체·데이터센터·해양기술까지 그룹 역량을 결집해 오픈AI와 전략적 동맹을 강화할 방침이다. 내부적으로는 임직원 생산성과 혁신 속도를 높이기 위해 ChatGPT 사내 도입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HBM 1위 굳힌 SK…핵심 파트너 부상
같은 날 SK도 올트먼 CEO와 회동하며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공급 LOI를, SK텔레콤은 서남권 AI 데이터센터 구축·운영 MOU를 각각 맺었다.
최태원 회장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핵심 파트너로 참여하게 됐다"며 "메모리부터 데이터센터까지 아우르는 SK의 통합 역량을 집중해 글로벌 AI 인프라 혁신과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HBM에 집중한 전략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서 HBM 공급 파트너로 참여키로 하면서 세계 1위 HBM 시장 점유율과 양산 경험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 글로벌 D램 매출 1위 기업으로 HBM 시장 점유율에서도 선두를 지키고 있다.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하이닉스의 생산 능력이 글로벌 AI 칩 생태계의 병목을 해소할 핵심 변수로 꼽힌다. 업계에선 "AI 전용 메모리 기술력과 대규모 양산 경험이 이번 파트너십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울러 SK텔레콤은 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영 경험을 토대로 서남권에 오픈AI 전용 데이터센터를 세운다. 향후 이 시설은 '스타게이트 코리아'로 발전해 아시아 AI 허브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 SK는 앞서 AWS와 'SK AI 데이터센터 울산' 기공식을 연 바 있어 동서 지역을 연결하는 AI 벨트 전략도 가시화하고 있다.
최 회장과 올트먼 CEO는 이미 2023년부터 긴밀히 협력, AI 인프라 청사진을 함께 설계해왔다. AI 학습·추론 워크로드 급증에 대비해 전용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가 동시에 확충돼야 한다는 점에 공감, 차세대 메모리-컴퓨팅 아키텍처 같은 혁신 기술 공동 개발 논의도 이어왔다.
이번 파트너십은 칩 개발에서 데이터센터 운영까지 전 주기에 걸친 협력의 출발점으로 글로벌 AI 생태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SK그룹은 AI를 차세대 성장축으로 삼아 사업 포트폴리오를 빠르게 혁신 중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협력을 강화하며 K-AI 생태계 확산에도 기여하겠다는 구상이다.
업계 안팎에선 "삼성과 SK의 동시 합류는 한국이 글로벌 AI 인프라 전선의 전략 거점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는 진단이 제기된다. 반도체·통신·데이터센터·해양 기술을 아우르는 협업 구도가 짜이면서 미국과의 AI 동맹도 한층 강화되는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는 "AI 학습용 반도체와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드물다"며 "양대 그룹의 동시 참여는 한국이 AI 생태계 전 주기를 책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