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를 고리로 한 새 관세 방안을 만지작대고 있다. 전자제품에 들어간 칩의 개수와 가치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초유의 방식부터, 해외 생산량만큼 미국에서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면 최대 100% 관세를 매기겠다는 구상까지 동시에 부상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다. 미국 내 생산 확대를 강제하는 '리쇼어링' 압박이다. 아직 구체화 단계는 아니지만 업계는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공급망 혼란과 한국 기업의 직격탄을 우려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꼬일라…車업계까지 긴장 고조
29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수입 전자제품에 들어 있는 반도체 칩의 추정 가치에 일정 비율을 곱해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내부 검토 중이다.
칩이 많을수록 관세 부담도 커지는 구조다. 한 소식통은 일본·유럽연합(EU)산은 15%, 기타 지역은 25%의 관세율이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사실상 전자제품에 들어간 반도체를 '개수 단위'로 환산해 과세하겠다는 초유의 시도다.
전동 칫솔부터 노트북, 자율주행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이 관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시장은 술렁이고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련의 관세 구상은 결국 한국을 포함한 해외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내 투자와 생산을 더 확대하라는 압박"이라며 "미국은 2030년 반도체 패권국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이번 언급되는 정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특히 HBM이나 파운드리처럼 고객사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분야는 투자 여력이 간단치 않아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대응 전략을 정교하게 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실행 과정의 불확실성이다. 전 세계 공급망이 얽힌 전자제품에서 각 칩의 생산지를 일일이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이폰만 해도 △한국 메모리 △일본 이미지센서 △대만 TSMC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중국·인도 조립공장에서 합쳐져 미국에 들어온다. 어떤 기업이 어느 국가 관세율을 적용받을지 불투명하다.
또 자율주행 전기차 한 대에는 통상 1000개 이상 반도체가 들어가는데 미국에서 만든 칩이 해외를 거쳐 다시 역수입되는 경우도 있다.
"투자 인센은 당근, 개수 관세는 채찍"
업계 내에선 가격 인상 및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한 경고가 나온다. 메모리 가격이 이미 급등하는 상황에서 추가 관세는 오히려 미국 내 소비자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도 "미국산 제품이라도 핵심 부품에 새 관세가 붙으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시에 370억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고,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파예트에 38억7000만달러를 들여 패키징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그러나 후공정(패키징)만으로 미국산 인정이 가능할지 불확실하다. 나아가 정부가 각 칩의 생산지를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민감한 정보 공개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와 별개로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생산량과 수입량을 1대1로 맞추고,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기업이 미국 내 공장 건설 계획을 공식화하면 완공 전까지는 관세를 면제해 주는 유예안도 거론된다. 결국 "칩 개수 기준이든 생산 비율 기준이든 목표는 '리쇼어링'으로 수렴한다"는 게 업계 평가다.
이 교수는 "결국 두 가지 정책 모두 기업들로 하여금 미국 내 생산을 늘리라는 압박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며 "하나는 미국 내 투자를 약속하면 관세를 면제해주는 '당근'이고, 다른 하나는 칩 개수에 따라 언제든 매길 수 있는 '채찍'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트럼프가 '애플처럼 미국에서 생산하거나 약속한 기업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실제 적용 범위와 예외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며 "글로벌 경제 심장인 반도체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매번 방안을 흘리며 압박하는 모습 자체가 혼란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