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관계는 대체로 사적인 감정이나 친분보다 이익과 목표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파트너십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고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은 결국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신뢰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되어 파트너십을 지탱하고, 단순한 거래를 넘어 장기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끄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도 신뢰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비즈니스 관계를 이어온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유한양행과 미국의 길리어드사이언스입니다.
올해 유한양행은 길리어드사이언스와 세 차례에 걸쳐 총 2581억원 규모의 원료의약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이는 지난해(1077억원)의 두 배를 넘는 수준입니다. 공급 대상은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와 C형간염(HCV) 치료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의약품인데요. 완제의약품의 첨가제와 제형(캡슐, 정제 등) 같은 최종 제조공정이 이뤄지기 전 유효성분만 위탁 생산, 공급하는 겁니다.
올해 계약 규모가 커진 점도 의미가 있지만 그 이면의 관계는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유한양행은 오랜 시간 신뢰를 기반으로 길리어드와의 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왔습니다. 원료의약품 제조, 완제의약품 판매, 그리고 공동 연구개발에 이르기까지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며 관계의 깊이와 폭을 동시에 넓혀왔습니다.
시작은 단순 '판매'…원료의약품 공급으로 확장
양사의 첫 만남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한양행은 1996년 3월 길리어드와 항진균제 '암비솜(AmBisome)'의 국내 독점 판매 계약을 체결하며 인연을 시작했습니다.
암비솜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이 꾸준히 판매 중인 대표적인 완제의약품입니다. 완제의약품은 모든 제조 공정을 마치고 바로 유통, 판매를 거쳐 환자들이 투약할 수 있는 최종 제형을 의미합니다.
처음엔 길리어드가 유한양행에 완제의약품의 단순 판매를 맡기는 계약으로 시작했습니다.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 타 국가에서의 유통 및 영업은 아무래도 로컬 기업들에게 유리하니까요.
이후 2003년 협력 관계는 '공급' 영역으로 확장됐습니다. 유한양행은 HIV 치료제 '트루바다(Truvada)'의 핵심 원료인 엠트리시타빈(Emtricitabine)에 대한 원료의약품(API)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이듬해에는 342억원 규모로 추가 계약도 체결하며 길리어드의 핵심 원료 공급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국내 제약사가 글로벌 바이오기업에 고난도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원료를 공급하는 사례는 흔치 않았습니다. 유한양행이 의약품 제조 역량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형 품목 판매·R&D까지 '파트너십 진화'
원료 공급처로 입지를 다져온 유한양행은 2009년 다시 한번 협력의 폭을 넓혔습니다. 길리어드의 HIV 치료제 '트루바다'와 '비리어드'에 대한 국내 독점 판매 계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두 제품은 허가 절차를 거쳐 2012년부터 유한양행이 판매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트루바다는 국내 HIV 치료제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비리어드는 국내 의약품 시장 1위(2017년 기준 매출액 약 1500억원)에 오르며 유한양행의 실적을 견인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한양행은 단순한 제조 파트너를 넘어 길리어드 제품의 한국 내 공식 창구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특히 대형 품목의 유통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점은 길리어드가 유한양행의 상업적 역량 전반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유한양행이 판매 중인 길리어드의 주요 품목은 암비솜과 비리어드 외에도 '빅타비(HIV 3제 복합제)', '베믈리디(B형간염 치료제)' 등이 있는데요. 이 네 가지 품목의 2024년 합산 매출은 총 1570억원으로, 이는 유한양행 약품사업 매출의 11.6%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한양행의 지난해 매출이 2조678억원으로 '국내 제약사 매출 순위 1위' 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출의 11%는 적지 않은 비중입니다.
이 외에도 유한양행은 HIV 치료제 '젠보야', '스트리빌드', '데스코비', C형간염 치료제 '하보니', '엡클루사', '보세비' 등 길리어드의 핵심 제품군을 국내 시장에 판매하고 있는데요. 이는 단순한 판매대행을 넘어 두 회사가 함께 국내 시장을 설계하고 키워가는 파트너임을 보여줍니다.
양사의 협력은 연구개발(R&D) 영역으로도 확장됐습니다. 유한양행은 2019년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ASH) 치료 후보물질을 길리어드에 기술이전하며 총 7억8500만 달러(한화 약 1조13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비록 지난해 길리어드가 비임상 단계에서 기술을 반환하면서 공동 R&D는 무산됐지만, 유한양행은 길리어드와 단순 거래를 넘어서 신약 개발이라는 더욱 깊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빅파마와 파트너십, 글로벌 진출 '이정표'
글로벌 제약사들은 보통 원료의약품은 제조 단가, 완제의약품은 영업·마케팅 역량에 따라 파트너사를 수시로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유한양행과 길리어드는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결같은 파트너십을 유지해왔습니다. 이는 유한양행의 기술력과 영업력, R&D 역량에 이르기까지 '신뢰'라는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한양행은 이 오랜 협력을 통해 세계 수준의 원료 생산 능력, 규제 대응력, 마케팅 역량을 쌓아왔고, 이는 타 글로벌 파트너십에서도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는데요.
유한양행과 길리어드의 장기적 파트너십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빅파마와 신뢰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 영역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처럼 기술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 협력을 이끌어낸 경험이 앞으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