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표 페인트’로 잘 알려진 정밀화학 중견그룹 노루(NOROO)를 겨냥해 KCC가 쏘아올린 공이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비록 경영권 위협 요소는 아닐지언정, KCC가 끌어올린 주가로 인해 오너 일가들의 차익실현 욕구가 꿈틀대고, 우회적인 3대 지분승계 비용이 불어나는 양상이다.
노루홀딩스 주가 10년만에 3만원대
22일 KCC에 따르면 지난 6월27일부터 이달 9일까지 장내매수를 통해 노루그룹 지주회사 노루홀딩스 지분 9.90%를 확보했다. 소요된 자금은 347억원(주당 평균 2만6400원)이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 2개월여에 거쳐 총 51거래일 동안 단 하루도 주식 매입을 거른 적이 없다. 액수로도 일평균 6억8000만원꼴이다. 지난달 11일에는 29억원을 투입하기도 했다.
반면 KCC는 일련의 행보가 경영 참여 의도가 없는 ‘일반투자’ 차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노루그룹은 2대 사주인 한영재(70) 회장의 지배기반이 비교적 탄탄해 쉽게 경영권을 넘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한 회장은 노루홀딩스 최대주주로서 개인지분 25.68%를 소유 중이다. 오너 일가 5명, 관계사 2곳 등 특수관계인을 포함하면 45.35%다. 홀딩스는 22.89%의 자사주도 갖고 있다. 이를 합하면 68.24%나 된다.
다만 KCC와 노루가 국내 도료시장 1위(점유율 34%), 2위(22%)의 경쟁사인 점을 감안하면, 한 회장으로서도 느닷없이 주요주주로 등장한 KCC가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불편한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KCC의 출현이 실제 오너 일가 주주들의 동향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모습이다. 한 회장의 우호지분 역할을 하는 친인척들의 투자회수 욕구가 커지는 듯한 양상이어서다.
최근 홀딩스 주가 흐름과 무관치 않다. 2018년 이후 낮게는 6000원대, 높아봐야 1만6000원대 수준이던 주가(종가 기준)가 5월 말부터 급반전했다. 6월 들어서는 2만원을 넘어서더니 8월 말에는 3만원대로 뛰었다. 이달 2일에는 3만6250원을 찍기도 했다. 홀딩스의 3만원대 주가는 2015년 10월 이후 거의 10년만이다.
여권이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상법 3차 개정안 영향도 있지만, 6월 말 이후로는 홀딩스 주식을 매일 쉼 없이 빨아들여온 KCC의 매수 기반도 주가 상승에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매매동향을 보면, 단기급등(주당취득가 6월27일 2만3100원→9월9일 3만5400원)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사들여온 양상이다.
우회승계 카드 DIT, 홀딩스 취득가 3배 ‘껑충’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격이다. 노루홀딩스 주식 1.08%를 보유 중이던 방계 주주사가 6월초~8월 말 0.1%만 남기고 모두 장내 처분했다. 디어스아이다. 한 회장의 둘째 남동생 한진수(68) 디어스 회장이 주인(지분 58.92%)인 인쇄잉크 제조업체다.
원래는 한진수 회장이 가지고 있던 주식이다. 이를 디어스아이가 작년 9월말 블록딜을 통해 19억원(주당 1만3410원)에 전량 넘겨받았다. 결국 홀딩스가 주가가 뛰자 1년도 안돼 계속 팔아치워 주식 대부분을 차익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디어스아이는 외려 지난달 노루그룹 주력사 노루페인트 주식은 1억여원어치를 사들여 0.24%로 늘렸다.
디어스아이의 홀딩스 주식 매각금액은 30억원(주당 2만2700원)이다. 수익률 69.4%로 12억원(주당 9310원)의 수익을 챙겼다. KCC 출현 이후 한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종전 46.33%에서 소폭이나마 되레 0.98% 축소된 것은 전적으로 다어스아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한 회장의 두 누나도 투자회수에 나섰다. 한인성(76), 한명순(74)씨다. 2001년 3월 이후 무려 24년만이다. 이달 10일 각각 1.66% 중 0.38%씩을 블록딜로 넘겼다. 특히 주당 가격이 3만4100원(당일 종가)이나 됐다. 이를 통해 각각 17억원을 손에 쥐었다.
딜이 이뤄진 시점은 KCC가 홀딩스 지분을 1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확대한 다음날이다. 지분을 받아준 곳은 디아이티(DIT)다. 이는 다분히 KCC를 의식해 한 회장이 지배지분 감소를 막으면서 동시에 후계자의 승계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다중 포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DIT는 고(故) 한정대 창업주의 장손이자 한 회장의 1남1녀 중 장남인 한원석(39) 부사장의 개인 IT업체다. 한 부사장은 홀딩스 지분이 3.75%에 불과하지만 DIT 주식은 전량(97.7%․이외 자기주식 2.3%) 개인 소유다.
한 회장은 DIT를 우회 지분승계 카드로 활용해 왔다. 한 회장이 2022년 5월 4.51%를 시작으로 2023년 10월 2.72%, 작년 7월 2.21% 등 홀딩스 지분을 1년 주기로 DIT에 넘겨왔던 것. 이어 한 회장 누이들의 0.75% 추가 매입을 통해 DIT는 10.16%로 확대했다. 한 부사장으로서는 13.91%를 직접적인 영향권에 두게 됐다.
한데, DIT의 이번 0.75% 주당취득가 3만4100원은 이전에 비해 191.7%(2만2400원) 비싼 값이다. DIT가 한 회장의 9.4%를 인수하는 데 든 자금은 3차례에 걸쳐 70억원, 38억원, 38억원 도합 146억원으로 주당 1만1700원꼴이다. 즉, 종전과 비슷한 34억원을 들이고서도 지분 보강은 이전의 3분의 1밖에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KCC가 촉발한 홀딩스의 주가 상승이 한 회장이 3대 세습을 위해 부쩍 공들이고 있는 우회 지분승계의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있고, 대물림 작업을 더디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